신숭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641
한자 申崇謙
영어공식명칭 Shin Soonggyeom
이칭/별칭 장절(壯節),삼능산(三能山),신능산(申能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홍승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918년 6월 15일 - 신숭겸 궁예 축출 후 왕건을 왕으로 옹립
몰년 시기/일시 927년 09월연표보기 - 신숭겸 사망
추모 시기/일시 994년 4월 23일[음력, 양력 994년 6월 4일] - 신숭겸 태조묘정 배향
추모 시기/일시 1027년 4월 12일[음력, 양력1027년 5월 20일] - 신숭겸 태조묘정 배향
거주|이주지 철원 - 강원도 철원군
묘소|단소 신장절공묘역 - 강원도 춘천시
사당|배향지 지묘사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성격 공신
성별
대표 관직 태사(太師)

[정의]

남북국 시대 태봉의 수도였던 철원 지역에서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옹립한 고려의 개국공신.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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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신숭겸(申崇謙)[?~927]은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이며,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출신지는 『고려사(高麗史)』에 광해주(光海州)[현 강원도 춘천시]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곡성현(谷城縣)[현 전라남도 곡성군]으로 보는 이견이 실려 있다. 초명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삼능산(三能山)으로, 『고려사(高麗史)』에 능산(能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래 삼능산이었으나 고려 초 토성분정(土姓分定) 정책에 의해 신(申)을 성씨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신능산(申能山)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생은 신능길(申能吉), 아들은 신보(申甫)이다.

[활동 사항]

태봉(泰封)의 기병 장수였던 신숭겸은 918년 6월 15일 복지겸(卜智謙)·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과 공모하여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왕건(王建)을 국왕으로 옹립하였다. 왕위에 오른 왕건은 국호를 고려로 변경하고 918년 8월 개국에 기여한 인물들을 포상하였는데, 신숭겸은 반정을 주도한 공로로 복지겸·홍유·배현경과 함께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고려 건국 이후 왕건의 유화정책으로 많은 호족들이 귀부해 옴에 따라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긴장이 심화되자, 신숭겸은 대장으로서 전쟁에 참여하여 왕건을 보좌하였다. 927년 9월 후백제 왕 견훤(甄萱)이 신라의 수도 경주를 침략하여 경애왕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앞서 신라에 지원군 1만 명을 파견하였던 왕건은 경애왕의 사망 소식을 듣고 몸소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이때 신숭겸왕건과 함께 출전하여 공산(公山)[현 대구광역시 팔공산]에서 후백제군을 맞았다. 하지만 공산 전투는 고려군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 왕건이 후백제군에 포위되는 상황에 이르렀고, 왕건을 보좌하던 신숭겸은 치열한 전투 끝에 왕건을 구하고 대장 김낙(金樂)과 함께 전사하였다.

[묘소]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신숭겸을 안장한 신장절공묘역(申壯節公墓域)이 조성되었다. 신장절공묘역은 강원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공산 전투에서 신숭겸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진 왕건신숭겸의 죽음을 애도하여 장절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신숭겸이 사망한 장소에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명복을 빌게 하였다. 또한 신숭겸의 동생 신능길과 아들 신보를 모두 원윤으로 삼았다.

후대 왕들도 왕건을 위하여 희생한 신숭겸에게 존숭의 예를 다하였다. 성종과 현종은 각각 994년 4월 23일과 1027년 4월 12일에 신숭겸을 태사로 추증하여 태조 묘정에 배향하였고, 고려 후기의 충선왕은 역대 공신들의 후손을 등용하도록 명령하면서 특별히 신숭겸을 언급하였다. 또한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 수록된 「도이장가(悼二將歌)」는 예종이 1120년 신숭겸과 김낙을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향가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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