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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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潤鎬 |
영어음역 | Jo Yunho |
이칭/별칭 | 주견(周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감계리 648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경혜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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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감계리 648 |
성별 | 남 |
생년 | 1888년 7월 9일 |
몰년 | 1950년 5월 13일 |
본관 | 창녕 |
[정의]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1919년 당시 창원 읍내에서 매달 음력 2일과 7일에 열리던 5일장은 규모가 커서 장날마다 주변 농촌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은 3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각 지방의 독립 만세시위로 이어졌다.
경상남도 지역의 애국인사들은 비밀리에 3월 23일(음력 2월 2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3월 23일 오후 2시 20분 많은 군중이 모이자 주동 인물들은 장 한가운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앞장서서 외쳤다. 여기에 6,000~7,000명의 군중이 일제히 호응하여 만세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케 하였다. 이처럼 항일 저항의 사나운 분위기가 고조되어 헌병 및 경찰관 주재소원만으로는 손도 쓸 수 없게 되자 마산 중포대 대대의 일본군과 진해 요항부 장교 이하 26명의 일본군 대병력이 동원되었다. 이들의 무자비한 총검의 탄압으로 오후 5시 20분 군중은 부득이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주동 인물 31명이 검거되었다.
1차 의거에 이어서, 4월 2일 제2차 의거로 이어졌다. 조윤호를 비롯한 청년 15명은 의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4월 2일 장날을 재거사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면서 주변 지방에도 비밀연락을 취하였다. 4월 2일(음력 3월 2일) 오후 3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조윤호 외 15명의 청년 주동 인물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장으로 뛰어들었다. 이에 군중들도 열광적으로 호응하여 다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던 일본 경찰의 대응 또한 신속했다. 그 곳 주재 일본군 현병 9명은 재빨리 마산의 일본군 헌병 분견소의 응원을 얻어 주동 인물 1명을 검거하고 총검으로 군중들을 위협하여 만세시위는 일단 차단된 듯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만행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한 상인들은 노점과 상점의 문을 닫고 다시 만세를 외쳤다. 또 다시 6,000~7,000명이 호응하여 만세시위는 제1차 의거보다 강력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일본 경찰의 기록에도 이때의 만세시위를 “열광적인 소요가 야기되었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군중들의 항일의식이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조윤호를 비롯해 설관수(薛灌洙)·공도수(孔道守)·구재균(具在均)·김호원(金浩元)·조희순(曺喜舜) 등 주동 인물 20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조윤호는 이들과 함께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으로부터 6개월간의 형을 언도받아 마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2007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