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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산리 산신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1610
한자 葛山里山神祭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갈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성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중단 시기/일시 1950년연표보기 - 6·25 전쟁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1년연표보기 - 의례 시기가 음력 1월 14일 초저녁으로 바뀜
성격 민간 신앙|마을 제사
의례 시기/일시 음력 1월 14일 초저녁
신당/신체 산제당 산제바위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갈산리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갈산리 산신제는 매년 음력 1월 14일 초저녁에 갈산1리 주산[큰산] 아래 산제바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위하여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산신제의 제수는 돼지머리, 백무리[백설기], 삼색실과, 포, 청수 등이다. 예전에는 제관의 집에서 모든 제물을 담당했으나 요즈음은 부녀 회원들이 마을 회관에서 떡을 찌는 등 모든 음식을 준비한다. 제관은 초헌관·아헌관·종헌관·축관·집례 등인데, 마을의 임원과 노인 회원들이 주축이 된다. 비용은 마을의 공동 기금으로 충당하는데, 근래에는 산신제를 마친 뒤 결산 서류를 서산시에 제출해서 150만 원을 지원받는다.

갈산리 산신제의 전통은 매우 엄하여 예전에는 일주일 전에 부정이 없고 깨끗한 집을 정하여 산제당에 올라가는 전 제관이 함께 숙식을 하며 정성을 드렸다. 이 집은 마을과 격리되어 누구도 출입할 수 없었고, 제관들은 이곳에서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하며 행여 궂은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을 했다. 만일 산신제를 잘못 지내거나 제관의 정성이 부족하면 마을에 재앙이 발생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연원 및 변천]

갈산리 산신제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예로부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여 잠시 몇 해를 중단하자 마을에서 젊은이들이 까닭 없이 죽는 등 우환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산신제를 중단했기 때문이라고 여긴 당시의 젊은이들은 동네 어른들에게 다시 제를 모시자고 건의하여 산신제를 부활시켰다. 제일은 매년 정월 대보름 자시(子時)로 고정되어 있었는데 밤늦게 산제당으로 올라가는 일이 여의치 않아 2011년부터 정월 14일 초저녁으로 바꾸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산제당은 마을의 주산인 ‘큰산’ 상봉 밑에 위치한다. 당집이나 특별히 모시는 신위는 없고 커다란 바위 밑에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이 바위를 ‘산제바위’라고 한다. 또 산제당으로 가는 약 3부 능선 되는 지점에는 옹달샘이 하나 있는데, 여기에서 산신제를 지내러 올라가면서 청수를 뜬다.

[절차]

산신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면 마을 회관 앞에 황토를 펴고 왼새끼로 금줄을 친다.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하는 표식이다. 근래에는 모든 제물을 마을 회관에서 준비하기 때문에 상가를 다녀왔거나 기타 부정한 사람들은 출입을 할 수가 없다.

정월 14일 새벽에 제수를 구입하러 서산장으로 간다. 새벽에 장을 보러 가는 까닭은 부정한 것이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시장에 도착해서도 물건 값을 깎거나 흥정을 벌이지 않는다. 제수는 마을 회관에서 부녀 회원들이 준비를 한다.

산신제는 유교식 절차에 따라 분향→ 강신→ 초헌→ 독축→ 아헌→ 종헌→ 주민 헌작→ 소지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소지는 가장 먼저 마을의 안녕을 축원하는 대동 소지를 올린 다음 제관 소지→ 축관 소지→ 참석자 소지→ 가구별 세대주 소지 등의 순으로 올려 준다. 특별히 객지로 나간 자녀나 군대에 간 자식이 있으면 별도의 소지를 올려 주기도 한다. 이때 제관과 축관은 소지를 하나하나 불사르면서 그 집안의 형편이며 내력을 일일이 산신에게 아뢰며 고사 덕담으로 축원을 한다. 또한 종헌관이 마지막 잔을 올리고 나면 참석자 중에서 잔을 올리고 싶은 사람이 산신에게 헌작하고 재배한다.

[부대 행사]

산신제를 마친 정월 대보름에는 마을 주민이 모두 회관에 모여 반별로 윷놀이를 하며 동네잔치를 벌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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