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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824
한자 金弘郁
영어음역 Gim Honguk
이칭/별칭 문숙(文叔),학주(鶴洲),문정(文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춘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02년연표보기 - 김홍욱 생
활동 시기/일시 1635년연표보기 - 증광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46년연표보기 - 이조좌랑 승진
활동 시기/일시 1654년연표보기 - 황해도관찰사 전임
몰년 시기/일시 1654년연표보기 - ‘강옥(姜獄)’으로 친국 도중 장살됨
추모 시기/일시 1659년연표보기 - 관직 복구
추모 시기/일시 1718년연표보기 - 이조판서에 증직됨
추모 시기/일시 1719년연표보기 -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짐
추모 시기/일시 1719년연표보기 - 성암서원 창건 상소
추모 시기/일시 1720년연표보기 - 성암서원 건립
추모 시기/일시 1721년 5월연표보기 - 성암으로 사액 받음
출생지 서산
부임|활동지 황해도 - 황해도
묘소|단소 묘소 -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대로2리 먹수지
사당|배향지 성암서원 - 충청남도 서산시 성남1로 45[읍내동 673]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관직 황해도관찰사

[정의]

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문숙(文叔), 호는 학주(鶴洲). 증조부는 서산 지역의 경주 김씨 입향조인 김연(金堧)[1494~?]이고, 조부는 증 좌승지 김호윤(金好尹), 아버지는 찰방(察訪)을 지낸 김적(金積)이며, 어머니는 화순 최씨(和順崔氏)로 좌윤 최원지(崔遠之)의 딸이다. 부인은 참의(參議) 오정(吳靖)의 딸 동복 오씨(同福吳氏)이다. 아들은 현감 김계진(金季珍)이다. 형은 병자호란 중 험천 전투에서 전사한 김홍익(金弘翼)이다.

[활동 사항]

김홍욱(金弘郁)[1602~1654]은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1646년(인조 24)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권신(權臣)인 김자점(金自點)과의 불화로 사직하였다. 1650년(효종 1) 이후 집의, 승지를 거쳐 홍충도관찰사(洪忠道觀察使)로 대동법의 실시에 힘썼다. 효종김홍욱과 친분이 있었는데 김홍욱이 노부를 모시고 있음을 알고 아버지인 김적에게 가옥을 한 채 하사하였다. 특히 이 가옥은 1745년(영조 21) 여기에서 태어나 1759년(영조 35)에 왕비가 된 김홍욱의 4세손인 김한구(金漢耉)의 맏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생가이기도 하다.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한 1654년(효종 5)에 효종이 구언교(求言敎)를 내리자 8년 전 사사된 회빈 강씨[소현세자의 빈]의 억울함을 말하고, 그 원을 풀어줄 것을 상소하였다. 이른바 ‘강옥(姜獄)’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종통(宗統)에 관한 문제로 효종의 왕위 보전과도 관련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하던 문제였다. 김홍욱의 이 같은 발언은 효종을 격노하게 하였고, 결국 하옥되어 친국(親鞠)을 받던 중 장살되었다. 김홍욱의 관작 복구는 1659년(효종 10)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주청으로 이루어졌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후손들이 힘을 모아 편찬한 『학주전집(鶴洲全集)』이 있다. 『학주전집』은 원집(原集) 10권, 부록(附錄) 5권 합 6책으로 되어 있으며, 고활자본이다. 1718년(숙종 44)에 초간되었고, 1873년(고종 10) 7세손인 김만재(金萬載) 등이 시문과 부록을 증보하여 중간(重刊)하였다. 신응조(申應朝)의 중간서(重刊序), 권변(權忭)의 구서와 김상현(金尙鉉)의 중간 발문이 있다. 내용은 동행록·남행록·시·소(疏)·차(箚)·계사·전문·교서·서독(書牘)·묘갈·묘표·행장·제문·서(序)·기(記)·잠(箴)·상량문·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소]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김홍욱의 묘와 신도비가 위치하고 있다. 신도비는 장방형의 화강석 대좌 위에 오석을 세우고 전면에 명문(銘文)을 음각하였다. 명문은 송시열이 찬하고 윤득화(尹得和)가 썼으며, 유척기(兪拓基)가 전액(篆額)을 썼다. 신도비에서 약 150m 지점에 묘역이 있는데, 묘비와 문인석·동자석·망주석 등을 갖추고 있다. 비문은 박필주(朴弼周)가 찬하였다. 묘역의 남향으로 아버지 김적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718년(숙종 44) 민진후(閔鎭厚)의 주청으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이듬해인 1719년에는 마침내 문정(文貞)이라 시호를 받았다. 서산시 읍내동에 위치한 성암서원은 고려 후기 공민왕 대의 문신인 유숙(柳淑)[1316~1368]과 김홍욱을 배향하고 있다. 김홍욱에 대한 포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1719년 2월 호서 유생 60여 명이 창건 상소를 올려 7월에 마침내 허락을 받아내면서부터이다. 서원에서는 통문을 돌리고 비용을 모아 1720년 가을에 서원이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더불어 이 지역 유생들이 같은 해 11월에 다시 청액소를 올려 1721년(경종 1) 5월 비로소 ‘성암(聖巖)’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05.18 내용 수정 활동사항 문장 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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