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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822
한자 金弘翼
영어음역 Gim Hongik
이칭/별칭 익지(翼之),묵재(默齋),충민(忠愍)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춘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1년연표보기 - 김홍익 생
활동 시기/일시 1628년연표보기 - 의금부도사
활동 시기/일시 1630년연표보기 - 장악원직장
활동 시기/일시 1631년연표보기 - 감찰
활동 시기/일시 1632년연표보기 - 공조좌랑
활동 시기/일시 1632년연표보기 - 연산현감
몰년 시기/일시 1636년연표보기 - 김홍익 졸
추모 시기/일시 1741년연표보기 - 충신 정려를 받음
추모 시기/일시 1794년연표보기 -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56년연표보기 - 치제(致祭)
출생지 서산
부임|활동지 연산현 - 충청남도 논산시
묘소|단소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정죽동
사당|배향지 충곡서원 -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산 115-2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관직 연산현감

[정의]

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익지(翼之), 호는 묵재(默齋). 증조부는 서산 지역의 경주 김씨 입향조인 김연(金堧)[1494~?]이고, 조부는 증 좌승지 김호윤(金好尹), 아버지는 찰방(察訪)을 지낸 김적(金積)이며, 어머니는 화순 최씨(和順崔氏)로 좌윤 최원지(崔遠之)의 딸이다. 초취[처음 장가가서 맞이한 아내]는 파평 윤씨 참판 윤민일(尹民逸)의 딸이며, 재취[두 번째 장가가서 맞이한 아내]는 해주 최씨 좌랑 최집(崔潗)의 딸이다.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학주 김홍욱(金弘郁)의 큰형이다.

[활동 사항]

김홍익(金弘翼)[1581~1636]은 1614년(광해군 6)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8년(인조 6) 의금부도사, 1630년 장악원직장, 1631년(인조 9) 감찰을 지내고, 1632년(인조 10) 공조좌랑을 거쳐 연산현감이 되었다. 연산현감으로 재직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감사 정세규(鄭世䂓)를 따라 수원으로 진군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의 사적은 논산의 충곡서원에 소장된 『충곡서원지(忠谷書院誌)』에 김홍익의 가장과 시장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병자호란으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파천하고 전국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였다. 당시 김홍익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73세의 노인으로 서산의 집에 있었고, 그의 막내 동생인 문정공 김홍욱은 당시 검열이라는 직책으로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가 있어 부모를 모실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김홍욱이 말하길 “남한산성은 위기일발로 위험한데 오늘 비록 부모는 계시지만 군신의(君臣義)가 급하지, 어찌 틈을 내어 사사로이 돌볼 수 있겠는가?”라며 즉시 서산으로 가서 고별인사를 드리고 그날 군기와 병사 2,400여 명을 데리고 관찰사 정세규와 함께 근왕으로 호위하기 위하여 갔다.

양지읍과 헌릉을 경유하여 광주 험천(險川)에 이르렀을 때 적의 습격을 받아 많은 군사가 희생되었고 김홍익은 쌀섬 위에서 군대를 지휘하면서 격전 끝에 여러 명의 적을 살해하였으나 불행히도 칼이 부러지며 전신에 칼과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이때 통인인 장사정(張士貞)은 김홍익의 시체를 안고 나오던 중 또한 적군의 칼에 맞아 죽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통인의 처는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 후 문정공 김홍욱은 상소하여 휴가를 받아 형 김홍익의 시신을 수습하여 모시고 고향으로 와서 장사를 지냈다. 묘역은 서산의 북쪽에 있는 현리 묘향(卯向)으로 현재 지곡면 도성리 저주동이다.

부친 참판공 김적은 아들을 위하여 지은 제문에 “너는 마음속으로 효성과 우애뿐이다. 집안의 모든 일은 너를 의지했었다. 또한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기대하는 것은 내 생전에 나에게 효를 하고 내가 죽은 후에는 예로 장사를 지내기를 바랐다.”고 하며 자식을 잃은 애절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가 죽기 전 연산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서산에 계신 아버지가 꿩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늘 봉양하였다고 한다. 연산현[현 충청남도 논산시 일원]의 명관록(名官錄)에는 김홍익은 성품이 청렴결백하였으며, 정화에 힘쓰고 군을 보살핌에 최선을 다하여 군이 태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묵재실기(默齋實紀)』 3권 1책이 전한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에 신도비와 함께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김재찬(金載瓚)이 짓고, 글씨는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이 썼으며, 이조원(李肇源)이 전(篆) 하였다.

[상훈과 추모]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김홍익과 관련한 기사가 인조 대부터 순조 대까지 확인된다. 1741년(영조 17)에 충신 정려를 받았고, 1794년(정조 18)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충민(忠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또한 1756년부터 나라에서는 예관을 보내서 매년 제사를 지내주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현재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에 있는 충곡서원에서 배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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