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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80
한자 現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지수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8월 15일연표보기 - 해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6년연표보기 - ‘신탁 통치 무조건 반대론’ ‘모스크바 삼상회의안의 총체적 지지론’을 둘러싼 다툼 치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6년연표보기 - 추수 봉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6년 10월연표보기 - 토지의 균등 분배, 쌀의 공정 분배, 미소공동위원회의 조속한 재개 등을 요구하며 격렬한 소요 사태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8년 - 분단 정부 수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7년연표보기 - 대호지면·정미면이 당진면에 이속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3년연표보기 - 태안면이 읍으로 승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0년연표보기 - 안면면이 읍으로 승격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4년연표보기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특별법」에 기초한 좌우익 투쟁 진실 규명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7년연표보기 - 허베이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건

[정의]

1945년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역사.

[정치]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서산 지역도 커다란 정치적 변화에 직면하였다. 일제 강점기 ‘유지(有志) 명부’에 올라 있었던 주요 인물들과 ‘요주의·요시찰인 명부’에 올라있던 사람들의 정치적 지위가 갑작스럽게 뒤바뀌기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른바 ‘당국신용(當局信用)’을 가진 지방 유지들은 ‘친일파’나 ‘반민족 행위자’로 매도된 반면, ‘불령선인’이니 ‘좌익분자’니 하는 ‘낙인’은 오히려 정치적·도덕적 권위를 상징하는 ‘신임장’으로 바뀌었다.

해방 직후 서산 지역에 나타난 최초의 정치적 움직임은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 활동이었으며 건국준비위원회는 이후 곧바로 ‘인민위원회’로 전환되었다. 미국은 미군정을 수립하자마자 각지의 인민위원회를 불법화하고 좌익 세력의 정치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46년에 접어들면서 전국 각지에서 ‘신탁 통치 무조건 반대론’[우익]과 ‘모스크바 삼상 회의안의 총체적 지지론’[좌익]을 둘러싼 다툼이 치열해지자 미군정은 일방적으로 우익 편을 지지하며 좌익들의 정치 활동을 탄압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서산 지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946년 초 서산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은 이종만(李鍾萬)[당시 60세, 천도교인]이었으며, 청년동맹의 위원장은 김동운(金東雲)[당시 35세, 한약상], 부위원장은 김대원(金大遠)[당시 32세, 과자상]이었다. 서산 지역의 좌익 세력은 1946년부터 본격화된 미군정과 우익의 총반격, 특히 1946년 가을에 있었던 이른바 ‘추수 봉기’로 말미암아 급격히 그 세력을 상실하였다. 1946년 10월 말 서산에서도 토지의 균등 분배, 쌀의 공정 분배, 미소공동위원회의 조속한 재개 등을 요구하며 격렬한 소요 사태를 야기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우익 단체로는 독립촉성협의회(獨立促成協議會) 서산지부와 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과 같은 청년 단체가 유명하였다.

이 같은 정치 갈등 과정에서 1948년 결국 남북한에는 각각 ‘상대의 절멸’[북진 통일, 국토 완정]을 공언하는 분단 정부가 수립되었다. 서산 지역에서도 단선 단정 반대 투쟁의 과정에서 제헌 의원 선거와 지하 선거[연판장 선거]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회]

해방 공간의 좌우 갈등은 6·25 전쟁 시기에도 지속되었다. 서산 지역의 경우, 전투 과정에서는 큰 피해가 없었으나, 다양한 형태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 무수히 발생하였다. 개전 초기 보도 연맹원 학살, 인공 시기 우익 인사 학살, 수복 후 부역자 학살 사건 등은 전쟁 시기 이념의 차이로 발생한 커다란 비극이었다. 2004년에 만들어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특별법」에 기초한 진실 규명 결과, 당시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음이 밝혀졌다. 전쟁 시기 좌우익을 막론하고 서산 지역의 정치명망가들 대부분이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

전쟁 이후 1957년 대호지면·정미면이 당진면에 이속되고, 1973년에는 태안면이, 그리고 1980년에는 안면면이 읍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 개발 정책이 서울-대전-대구-부산을 잇는 ‘경부축’을 중심으로 진행됨으로 인해 지역적 소외감과 낙후는 면할 수 없었다.

[경제]

서산 지역의 약진은 개간과 간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60~1970년대에도 간헐적인 개간과 간척이 이루어졌으나, 천수만을 가로막는 서산AB지구방조제의 건설은 유래 없는 큰 개발 공사였다. 천수만서산AB지구방조제가 건설되고 드넓은 간척지에 현대서산농장이 들어선 것은 서산 지역의 역사상 일대 사건이었다.

또한 이른바 정부가 ‘서해안 시대’를 표방하며 서해안고속국도를 개통하고, 더불어 많은 방조제와 간선 도로, 항구와 공단이 입지하면서 서산은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이후 충청남도의 다른 지역들의 인구가 매년 감소 추세임에 비해 서산 일대의 인구는 점차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급격한 개발은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대규모 간척 사업도 그러하거니와 대산이나 죽산 등지에 건립된 공단, 특히 대규모 화학 공장들이 입지함으로써 서산의 자연 생태 환경은 급속도로 오염되고 있다. 2007년에 발생한 허베이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건은 대표적인 해양 생태계 오염을 초래한 사건 중 하나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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