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79
한자 瑞山港
이칭/별칭 입장항
분야 지리/인문 지리,역사/근현대
유형 지명/시설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양대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지수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준공 시기/일시 1940년 6월연표보기 - 서산항 준공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0년대 중반 - 서산항 축항기성회 조직
최초 설립지 서산항 - 충청남도 서산군 서산읍 양대리
성격 어항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양대동에 있었던 항구.

[개설]

경남철도주식회사에 의해 충남선[현 장항선]의 건설이 시작되어 1922년에 천안~온양 구간, 1931년 8월에 온양~장항 구간 노선이 개통되었다. 그러자 주로 인천을 통하던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의 물류가 철도를 통해 장항이나 경성 지역으로 이출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 경성과 호남 지방으로 가는 것은 천안이나 대전을 우회하는 철도보다는 여전히 뱃길이 더 편리하고 경제적이었으며, 장항부두가 건설되면서 1940년 6월 9일 서산군 서산읍 양대리[현 서산시 양대동]에 서산항[입장항]을 건설하고 서산과 군산을 잇는 정기 항로를 개설하였다.

[건립 경위]

1930년대 중반 서산의 유지들은 서산항 건설을 위해 서산항 축항기성회(瑞山港築港期成會)를 조직하고 서산면장과 함께 적극적인 로비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의 일환으로 서산면장 원창희와 서산항축항기성회장 천단승춘(川端勝春), 부회장 나창헌(羅昌憲) 외 지방 유지 여러 명은 8만여 원의 거금을 들여 서산~양대 간 도로 6㎞를 건설하였다. 나창헌은 당시 충청남도 도평의회원을 역임하고 있었으며, 해방 후에는 우익 단체인 협찬회[회원 40명]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서산 지역의 유지들은 서산항 축조를 계기로 하여 서산을 서해의 나진(羅津)으로 만들기 위해 로비와 청탁, 향응과 뇌물 등을 매개로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쳐나갔다.

1940년 5월 18일자 『동아일보』에는 “충청남도가 충청남도 서부의 보고인 서산 지방의 경제적 개발을 기도하고, 이것의 구체적 자치로 하여 삼화해운사에 서산, 장항, 군산 간의 정기 항로 개설을 허가하여 주기로 하는 한편, 10만 원의 거금을 들여 1939년 8월 착공하였던 서산항의 완성을 축하하는 준공식을 거행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준공식에는 도지사를 비롯한 도간부 등 관민 유지 300여 명과 수천 명의 군민이 참석하였으며, 식이 끝난 후에는 군산으로부터 축하 입항하는 신조환(新造丸) 군서연락선(群瑞聯絡船)의 시승회, 축하 기념 씨름 대회, 기타 육상 경기 등이 개최되었다. 아울러 『동아일보』는 이 소식을 ‘십육만 군민의 복음’이라 평했다.

[변천]

서산항은 일본과 조선 서해안 항구 도시와 남만주[요동]를 잇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해방 이후 뱃길이 끊어지면서 서산항은 항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서산항이라 부르는 곳은 일제 강점기의 입장항이 아니라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에 새로 만들어진 대산항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