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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48
한자 言論鬪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지수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언론 운동
관련 인물/단체 조선어 신문사 지방 지국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전개된 조선어 신문사 지방 지국의 투쟁.

[개설]

일제 강점기 『동아일보』 지방판에 소개된 민원 사건으로는 1926년 1월 서산 소방조 문제 관련 민원, 1927년 6월 소작 관계 개선 문제[특히 경성 지주의 이중 운반 강요, 운반비 강요 문제]에 관한 민원, 1931년 1월 서산 지역 유치원에 관한 민원, 1930년대 초반 해미 수리 조합 문제 관련 민원, 1931년 1월 우편물 늑장 배달 문제 관련 민원, 서산지청 폐지 문제 관련 민원, 태안 지역 도로 개량 등에 관한 민원, 안면도 학교 증축 관련 민원 등이 있었다.

[역사적 배경]

일제 강점기 각 군에 설립된 조선어 신문사의 지국이나 분국은 지역 사회 운동이나 이른바 민원(民願) 활동의 매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제 강점기 지역 사회의 엘리트 청년들은 지국이나 분국 조직을 매개로 활발한 언론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지역 사회에 여러 가지 민원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사건에 개입하여 보도 기사나 지방 논단 등을 통해 강력한 여론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 강점기 서산 지역에서 언론 투쟁을 주도한 인물은 『동아일보』 지국의 경우, 이광훈(李光薰), 이종만(李鍾萬), 윤은동(尹銀同), 김맹윤(金孟倫), 조성남(曺成男), 김영순(金榮淳), 김동훈(金東勳), 이병철(李丙哲), 장윤옥(張允玉), 송석구(宋錫龜), 손봉목(孫奉穆), 이진우(李珍雨), 이상기(李相淇), 손태환(孫兌煥), 김동근(金東根) 등이었다. 이들은 서산 지역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에 대한 보도 기사뿐만 아니라 지방 논단, 시화(時話)의 형태로 지역 문제를 여론화하여 문제 해결에 큰 역할을 하였다.

[경과]

당시 서산 지역은 화재의 위험에 노출된 곳이 많고 발생률도 높았다. 그러한 이유 중 하나가 소방 장비의 노화와 운영상의 문제였다. 서산의 한 기자는 『동아일보』 1926년 1월 17일 기사를 통해, “부득이 읍내 청년 제군에게 일언을 고한다……제군은 반성하라. 이지(理智)와 의용(義勇)이 겸전(兼全)하고 생활도 유족한 제군이 어찌 지방에 화재, 아니 자기의 화재에 대하야 피안시 하려 하는가”라며 비판하였다. 『동아일보』 1927년 6월 16일 기사에는 소작 관계 개선 문제, 특히 경성 지주의 이중 운반 강요나 운반비 강요 문제에 대한 지방 논단이 눈에 띈다.

『동아일보』 1927년 6월 16일 기사의 “지방 유지는 지주 계급의 금후 태도를 주시하고 있다. 만일 악지주가 재래의 악습으로 결의를 무시하고 실행을 태만히 할 시는 공정한 사회 여론으로 제재(制裁)할 수밖에 없다. 지주회 제군은 성심성의로 그 결의를 실행하려거든 대표 위원을 선정하야 악지주로 하여금 회과(悔過) 실행하도록 권유하고, 만일 불응할 시는 최후 수단으로 기 악행을 조사하야 비판 또는 성토에 붙이고 엄정한 여론하에 사회적으로 매장하야 사회도덕을 숙청케 함이 결의의 본의가 될 것이며, 제군을 먹여주고 입혀주는 작인의 은혜를 보답하는 의미가 될까 한다”는 내용은 일종의 ‘협박’으로도 들린다.

『동아일보』 1931년 1월 27일 기사를 살펴보면 서산의 한 기자는 유치원 문제에 대한 시화에서 “서산군의 1년 간 소비되는 술값, 담배 값은 30만 원, 20만 원이다. 이는 군내에 중학 기관을 하나 설립하고도 남을 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 경비가 7,8백 원도 채 안 되는 유치원이 경영난으로 1930년 여름 폐쇄되기에 이르렀다. 연초나 주류로는 소비할 줄 알면서도 제2국민의 발전을 고려치 않음은 이곳 자아를 사랑하는 몸이 못되지 않는가? 유지는 깨달을 지어다”라고 일갈하였다.

『동아일보』 1931년 1월 27일 기사, 해미 수리 조합 문제에 관한 시화에서 한 기자는 “1930년 봄부터 해미 수조 결성 조짐, 조선 내 기설 수리 조합 중에는 우심(尤甚)한 자[30여 개소]에 대하야 당국도 그 구제책에 부심하고 관계 지주급 소작인이 신음 급 비난 하는 바 불소함은 세소공지(世所共知)의 사실이라. 해미 수리 조합에 있어서는 이 사실에 감(鑑)하야 영탄불상합(永炭不相合)하는 수리 조합을 연기 또는 중지함이 좋지 않을까?”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 같은 언론 투쟁의 결과인지 해미 수리 조합은 설립되지 않았다.

1931년 1월 27일 기사, 우편물 늑장 배달 문제에 관한 시화도 주목된다. 이 기사에 따르면, 서산군의 경우 우편물의 배달 지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화는, “서산~당진 간의 우편물도 4~5일, 5~6일은 빠른 것이다. 그리고 음암~정미 간은 2회 왕복에 1주일 이상 2주일까지 걸린다. 지척이 천리다”라고 사태의 진상을 정리한 뒤, “서산~당진 간 매일 2~3회의 정기 자동차가 있으니 직접 체송할 수도 있지 않은가? 관계 당국의 주의를 촉구한다.”라고 일침을 가하고 있다.

도로 개량 등과 관련한 지방 논단도 주목된다. 이 논단에 따르면, “태안은 일대 반도로서 10개 주변 면 인구의 인후 지대인 상업 요지이나 도로 시설이 불완전하야 소량의 강우만 있으면 소로는 말할 것도 없음[莫論]이오 심지어 시장통까지라도 진흙바다로 화하야 통행을 자유로 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이다.

이 논단은 “이는 모름지기 주민의 책임감이 박약함이나 그러나 면 당국은 일반 주민의 생명 재산을 좌우하야 면민의 복리 증진을 통제하는 기관이니 면내의 제반 시설이 불충분하야 면민의 생활상 지장이 있는 바에는 면 당국의 책임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하루빨리 시장통 및 동문, 서문통 도로에 사석(砂石)을 깔고 하수구도 정비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일제 강점기 민원 가운데는 특별히 학교 증축 관련 민원이 많았다. 1936년 8월 안면도에도 학교 증축 관련 민원 사건이 발생하였다. 지방 논단에 따르면, 안면도는 보통 면이나 남북으로 길게 뻗은 지형적 특성, 즉 섬이 많은 까닭에 1개의 보통학교[승언리]와 간이 학교[고남리]만으로는 교육 요구를 충족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논단은 “배움에 주린 아동을 문맹에서 벗어나게 함이 현하의 급무중의 급무이다. 이 어찌 등한시할 문제이랴. 면 당국과 도 당국은 물론이오, 지방 유지들도 상황을 돌보아 우 고남, 장곡 등 방면에 보교 1개소쯤 설치하기를 요망하는 바이다”라는 말로 논단을 끝맺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조선어 신문들은 흔히 ‘사회의 공기’요 ‘민중의 목탁’이라고 칭하였으며, 신문 기자를 ‘사회의 공인’이요 ‘무관제왕’ 혹은 ‘백두제왕(白頭帝王)’이라 별칭 하였다. 이런 별칭들은 일제 강점기 지국장이나 기자 직함이 얼마나 대단한 ‘권력’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당시 기자 직함은 ‘훌륭한 벼슬자리’였던 까닭에 “제밥 먹고라도 기자 명함만 쓰게 해달라는 사람이 수두룩”한 형편이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어 신문사의 지방 지국은 대부분 지역 사회 운동의 센터, 혹은 민원 활동의 중심 기관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이는 서산 지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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