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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35
한자 東學農民戰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지수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9월 14일[음력]연표보기 - 동학 두령 30인 체포
전개 시기/일시 1894년 9월 30일[음력]연표보기 - 동학 교주 최시형의 ‘기포 훈시문’이 예포대도소에 도달
전개 시기/일시 1894년 10월 1일[음력]연표보기 - 동학 농민군 기포 시작
전개 시기/일시 1894년 10월 11일[음력]연표보기 - 이승우가 이끄는 관군, 목소의 예포대도소 공격
전개 시기/일시 1894년 10월 22일[음력]연표보기 - 예포대접주 박희인, 태안군 동면 역촌리에 주둔
전개 시기/일시 1894년 10월 23일[음력]연표보기 - 예포대접주 박희인, 해미 구밀리로 진출
전개 시기/일시 1894년 10월 24일[음력]연표보기 - 예포대접주 박희인, 해미 여미평에 집결
전개 시기/일시 1894년 11월 5일연표보기 - 동학 농민군 해미성에 운집
전개 시기/일시 1894년 11월 7일연표보기 - 이두황의 경군 해미성의 동학군을 격파
전개 시기/일시 1894년 11월 8일연표보기 - 이두황군 1개 중대를 서산 지역에 급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 10월 28일연표보기 - 홍주성 전투 발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 11월 7일연표보기 - 해미성 전투 발발
성격 농민 봉기
관련 인물/단체 박인호|신백희|김경제|장성국|문장노|이치봉|박정기|송봉훈|박후동|서세린|성하영|이승우|이두황|박인호|박희인|원세록

[정의]

1894년에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일어난 반봉건·반외세 농민 봉기.

[개설]

서산 지역은 일찍부터 동학이 왕성하던 곳으로, 1894년 북접 농민군이 내포 지역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킬 때, 예산과 더불어 예포 농민군의 중심 근거지였다. 예포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싸운 홍주성 전투는 대단히 규모가 큰 전투였으며, 서산 지역에서는 해미성 전투와 매현 전투 등이 벌어졌다.

[역사적 배경]

서산 지역에 동학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이 발발하기 몇 년 전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서산·태안 지역을 포함하여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에 동학이 급속하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1907년에 천도교의 제4대 교주로서 활약한 덕산 출신의 박인호(朴寅浩) 때문이었다.

박인호 등 초기 지도자들이 1890년에 들어 서산 지역을 포함한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결과 많은 신도를 포섭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1894년 5월경에는 마을마다 포 조직이 만들어지고 매일 밤 동학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곳곳에 울려 퍼졌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자 지방 수령이나 사족들은 농민 수탈, 특히 동학 교도들에 대한 억압을 더욱 강화하였다.

[경과]

서산 지역에 농민 전쟁이 시작된 것은 1894년 4월경이었다. 김윤식의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에 보이는 보현동 이진사 습격 사건은 서산 지역의 포교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당시 농민군들은 서울 양반의 후예인 이진사라는 자가 동학군을 음해하고 재물을 탈취하자 그를 징벌하기 위해서 통문을 작성하고 마을마다 돌려 홍주 운천면 원벌[현재의 서산시 운산면 원벌리]에서 대회를 열고 이진사의 집을 습격하였다고 한다.

서산·태안 지역에서 조직적인 농민 봉기가 시작된 것은 1894년 10월 1일[양력 10월 29일]이었다.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9월 14일 태안군수 신백희(申百熙)와 종친부에서 파견된 별유사 김경제(金慶濟)가 서산·태안 지역의 동학 교도를 복종시킬 목적으로 동학 두령 30여 인을 체포·투옥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 예포대도소(禮包大都所)에 보고되고, 동시에 9월 30일 최시형의 ‘기포 훈시문’이 도달하자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의 동학 농민군은 거의 전 지역에서 봉기하기 시작하였다.

서산·태안 농민군은 태안 관아를 습격하여 처형 직전에 있던 동학 두령 30여 명을 구출한 뒤, 태안군수 신백희와 종친부에서 파견한 김경제를 체포하여 장터에서 작두로 공개 참수하였다. 또한 10월 1일 서산에서도 관청 습격 투쟁이 전개되었다. 당시 서산 농민군들은 서산군수 박정기(朴鉦基)를 율지촌으로 끌고 나와 참수하고 인부(印符)를 압수했으며, 이방이었던 송봉훈(宋鳳勳)도 타살하였다. 그런 뒤 서산·태안 지역의 농민군들은 계속해서 관아와 관속들의 집들을 방화하고, 이튿날 해미읍성을 점거하였다.

1894년 동학 농민 전쟁 시기 군수로 부임했다가 동학군에 피살당한 박정기는 이후 증직으로 군무참의(軍務參議)를, 그리고 함께 피살된 이방 송봉훈과 박후동(朴侯同)은 군부주사(軍部主事)를 증직 받고 순절비가 세워졌다. 또한 당시 예리(禮吏)였던 서세린[이후 서병언으로 개명]은 궐패를 지고 경성으로 가서 서산 지역의 전쟁 실태를 정부에 알리는 공을 세웠으며, 박정기의 후임으로는 토포사를 겸하여 성하영(成夏泳)이 부임하였다. 성하영은 이후 공주의 우금티 전투 등에서 농민 전쟁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충청감사로 승진하였다.

서산·태안 농민군의 봉기가 본격화하자 예포대도소에서는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의 10여 개 군현에 농민군을 직접 파견하여 무기와 관아의 곡식을 탈취하였으며, 인근의 부자들로부터 의연금[백미, 흰 소금, 돈 등]을 징수하여 본격적인 출전 채비를 갖추었다. 그러자 10월 11일 이승우(李勝宇)가 이끌던 관군은 예포대도소가 있던 목소(木巢)를 공격하여 농민군의 예봉을 꺾고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목소 전투 후 10여 일 동안 관군과 유회군이 크게 일어나 일부 지역에서는 농민군이 흩어지는 등 전세가 부분적으로 약화되기도 했으나 내포 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10월 15일경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재봉기하였다. 10월 22일 예포대접주 박희인(朴熙寅)은 농민군을 이끌고 태안군 동면 역촌리에 주둔하였다가, 23일 해미 구밀리로 진출하였으며, 24일에는 해미 여미평에 집결하였다.

10월 11일 목소 전투 이후 동학군과 관군이 다시 접전한 것은 10월 23일 여미평 부근의 고지와 해미성에서였다. 당시 해미에 주둔해 있던 관군은 동학군의 공격을 받아 열세에 처하자 일본군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일본군은 이 연락을 받고 아카마쓰[赤松國封] 소위로 하여금 1개 소대와 2개 분대를 이끌고 해미 지역으로 출동토록 했다.

일본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접한 농민군은 중심 대오(隊伍)를 여미평에서 당시 당진군 면천면 사기소리에 위치한 승전목[勝戰項]으로 이동했다. 그 결과 동학군과 관군 및 일본군은 승전목에서 조우하여 다시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승전목 전투는 내포 지역 농민이 일본군과 관군을 대상으로 최초로 커다란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승전목 전투 이후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군과 관군은 덕산을 거쳐 홍주로 퇴각하였다. 승기를 잡은 농민군은 면천에서 하루를 유진하고, 다음날 덕산 구만포를 지나다가 10월 20일경 관군과 접전을 하여 관군을 물리친 뒤 예산산성에 진을 쳤다. 내포 농민군은 10월 26일을 전후하여 예산의 신례원 부근과 예산산성에서 이승우가 이끄는 관군, 그리고 김덕경이 이끄는 유회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예산산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동학군은 여세를 몰아 그 길로 예산읍으로 들이닥쳤으나 예산군수가 이미 도망가 아무 풍파도 없이 주민들의 환영까지 받으며 읍내에 입성할 수 있었다. 예산을 완전히 장악한 농민군 지도자들은 다음 진격로를 정하는 데 고심하였다. 결론은 한양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발생할지도 모를 후방 공격의 후환을 먼저 없애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한양 진군을 포기하고 먼저 홍주성 점령을 결정하였다.

홍주성 전투는 10월 28일과 29일 양일간에 전개되었다. 홍주성 전투에는 3만 여 명에 이르는 충청남도 서북부 전체 지역의 농민군들이 가담하였으나, 앞서 있었던 농민군의 행군로나 홍주성 전투 패배 이후 퇴각로를 보면 주력군은 역시 서산·태안 지역의 농민들이었다. 당시 홍주성을 수비하던 일본군과 관군은 대략 1,00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무기나 통제력에서 농민군보다 월등한 입장에 있었다. 패배한 농민군은 갈산과 덕산 방면으로 퇴각하여 서산군 해미성에 웅거하였다.

홍주성 전투 이후 그때까지 대오를 떠나지 않은 농민군들은 11월 5일 해미성에 운집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당시 농민군 지도자는 박인호와 박희인이었으며, 서산의 지도자는 장세화 등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장위영 영관 겸 죽산 부사였던 이두황(李斗璜) 군의 가세로 재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당시 이두황은 막강한 위세를 자랑하던 경군을 이끌고 청주 인근의 세성산(細城山)에서 농민군을 진압한 뒤 일시로 공주로 진출하였다가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의 상황이 예사롭지 않자 다시 유구·예산을 거쳐 해미성에 당도하였다.

해미성에 당도한 이두황(李斗璜) 군은 11월 7일 새벽, 농민군이 아침 식사할 때를 노려 황락리 방면에서 해미성을 공격하여 2시간 남짓 혈전을 벌였다. 이때 농민군 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부상하였다. 전세가 불리하자 농민군은 서산 쪽으로 후퇴하여 구산성[귀밀성]과 저성[도루성]에 진을 쳤으나 그날 오후 다시 이두황의 공격을 받고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구산성과 저성에서 패한 농민군은 곧 당진·면천·서산·태안 지역으로 흩어졌다. 그 중 서산 매현(梅峴)에 진을 친 농민군 수는 천여 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서산·태안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무방비로 주둔하다 농민군의 동향을 예의 감시하고 있던 관군의 습격을 받고 결국 대오가 완전히 흐트러지고 말았다.

내포 동학 농민군의 마지막 전투지인 서산 매현부춘산 마사라는 설과 수석동 소탐산 북편이라는 설이 있으나, 서산 관아에서 동학군이 밥 짓는 연기를 보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수석동매현[현재의 서산시 수석동 산 93-3번지] 일대로 추정된다.

[결과]

내포 지역의 동학 농민 전쟁에는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의 농민이나 동학 교도들이 고루 참여하였다. 그러나 최초로 중심 대오가 결성되고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것도 해미와 서산이었다. 이는 당시 내포 농민군의 주력이 서산·태안 지역의 농민들이었다는 근거이다. 패전 이후 농민 전쟁에 참여했던 서산·태안 지역의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뱃길로 인천 지역이나 황해도 지역으로 이주하였으며, 고향에 그대로 남았던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 천도교 교도로서 동학 정신을 계승하여 지역 사회 운동의 발전에 여러모로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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