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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33
한자 製鹽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지수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1년연표보기 - 「염전매법」 폐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국유 염전 민영화

[정의]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이루어진 소금 생산업.

[개설]

조선 시대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는 바닷물을 가마솥에 끓여서 소금을 만드는 화염(火鹽)이나 자염(煮鹽) 생산이 활발하였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천일염 생산 방식이 보급되면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염전을 활용한 천일염 생산이 확산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서산 지역에서도 갯벌에 염전을 만들어 바닷물을 졸인 뒤 그 물을 벌막[釜屋]에서 끓이는 방식으로 소금 생산이 이루어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총독부가 관장하는 이른바 ‘전매제’가 실시되었다. 그만큼 소금이 귀하고 부가 가치도 높았기 때문이었다. 1950년대 이전만 해도 소금 한 가마는 쌀 한 가마와 교환될 정도로 고가였지만 선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들 정도로 귀했다고 한다. 전매 제도는 해방 뒤에도 유지되다가 1961년 「염전매법」이 폐지되면서 자유로워졌고, 1962년에는 국유 염전을 민영화하면서 완전 민영 체제로 전환되었다.

[입지 조건]

서산시의 천수만가로림만 일대는 간석지와 갯벌이 발달하고, 강수량이 적을 뿐만 아니라 일조량이 많아 옛날부터 소금 생산이 활발하였다. 천수만의 경우 갯벌이 발달한 곳은 사장포와 적돌강 남쪽, 안면도의 우측 해안 등 천수만 우측 해안이었다. 서산A·B지구방조제가 건설되기 전에 사장포 간석지는 남북 길이가 약 20㎞, 동서 폭이 약 5~10㎞에 달하였다.

[개항기의 제염업]

개항 이후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소금은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가격도 늘 높게 형성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개항기 서산 지역의 부호들은 소금을 굽거나 판매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편찬된 『서산군지』에 따르면, 개항기까지 서산에서 생산된 소금은 충청도 전체 소비량의 70%를 담당하였으며, 서산에서 생산된 소금은 경기도 외에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서산·태안 지역에는 일제 강점기 초기에 부자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았는데, 전하는 말로는 하나같이 소금을 구웠거나 소금 장사로 부를 축적하였다고 한다. 또한 서산 지역 최대 지주인 이기석, 이기승의 집안도 염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제염업]

제염업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 관제 염업 성행, 중국산 소금 유입, 연료 및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점차 쇠퇴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산의 염업은 일제 강점기 동안 꾸준히 지속되었다. 1925년 서산의 제염업자는 1,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소금가마의 수도 157개에 달하였다. 서산에서 소금 생산이 제일 활발하였던 지역은 이북면, 안면면, 근흥면, 대산면, 부석면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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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의 제염업]

일제 강점기 때 대형 염전은 대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 밀집해 있었다. 따라서 해방 이후 남한 지역은 만성적인 소금 부족 현상에 시달렸다. 그러자 정부는 외국의 암염(巖鹽)을 수입하는 한편 민영 염전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서산 지역에도 많은 염전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해방 후 소금 품귀 현상이 심해지자 서산 지역의 제염업도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48년 3월 15일자 『자유신문』에는 일단의 군중들이 서산경찰서 양대주재소를 습격한 사건이 보도되었는데, 기사 가운데 “900여 명의 염전 노동자 중 500여 명이 결근하고 있고, 부근 주민은 산중으로 도피하야 긴장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는 내용이 주목된다. 추측하건대 주재소 습격 사건은 양대리 근처에 위치한 염전 노동자들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1970년에 편찬된 『서산대관』에 따르면, 1970년 서산의 염전 면적은 1,415정보[1정보는 3,000평으로, 9,917.4㎡에 해당], 제염 장소는 140곳, 종업원은 1,147명 정도였다.

[제염업의 쇠퇴]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금 생산이 과잉 상태에 이르자 정부는 전매 제도를 폐지하고 1962년부터 염업을 민영화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천일제염은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산업이었으므로 1980년대 후반 들어 급속히 경쟁력을 상실하고 사양화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990년대 들어 기계염[한주 소금]이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서산 지역의 염전들도 속속 폐지되었다.

[현황]

염전은 현재 그 면적이 점점 축소되고 있지만 대산읍지곡면 등지에서는 아직도 천일제염이 이루어지고 있다. 2011년 기준으로 대산읍은 염전 14곳에 면적 102만 9000㎡에서 연간 5,110톤을 생산하고 있으며, 지곡면은 염전 한 곳에 면적 8만 3000㎡에서 연간 230톤을 생산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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