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19
한자 蓴城鎭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397년연표보기 - 지방 군제 개편에 따라 순성진 설치
개정 시기/일시 1457년연표보기 - 서산군에 통폐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48년연표보기 - 조정에서 유리된 민호를 본적지로 돌려보내도록 명함
관할 지역 순성진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

[정의]

조선 전기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에 설치되었던 진(鎭).

[개설]

순성진(蓴城鎭)은 1397년(태조 6) 이루어진 지방 군제 개편에 따라 서해안 수호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진을 설치하고 지군사(知郡事)를 두어 관할하던 곳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은 건국 초부터 해안 방비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집중적으로 시행하였는데, 이는 고려 말부터 자행된 극심한 왜적의 침입에 대처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1397년 전국 각 도에 각각 2~4개의 진을 설치하여 부근 군현의 병마를 관장하도록 하였는데, 순성진은 당시 충청도에 설치된 3개 진 중 하나였다.

서산과 태안 지역은 고려 이후 각종 세곡미 등을 중앙으로 운송하는 조운의 주요 경유지로, 순성진이 입지한 곳은 보다 안정적인 조운로 개척을 위해 1134년(인종 12)부터 시도된 굴포운하 개척사와 관련되기도 한다. 조선은 건국 직후인 1395년과 1397년 두 차례에 걸쳐 굴포운하 개착을 논의하고 최유경(崔有慶), 남은(南誾) 등을 파견하였는데, 1397년의 논의는 순성진이 설치된 후 5개월 만의 일이었다.

얼마간의 준비 과정 후 실제 운하의 개착이 시작된 것은 1413년(태종 13)이며, 당시 인근 주민 5,000여 명이 동원되어 2개월 동안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 때 대규모 역사에 필요한 인력 동원과 물자 조달 등의 제반 업무가 순성진을 거점으로 행해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관련 기록]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유방군(留防軍) 61명, 패속군(牌屬軍)이 300명, 신백정(新白丁)이 58명, 수성군이 5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순성진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군 동쪽 14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이는 현재 그 터로 알려진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와 일치한다. 축성 당시 높이는 6척, 둘레는 1,353척에 이르렀다. 신숙주(申叔舟)의 「태안군벽기(泰安郡壁記)」에 순성진의 간단한 내력과 지군사 박홍문(朴弘文)의 행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변천]

1397년에 설치된 순성진은 왜적을 방어하는 군사적 시설이자 굴포운하의 개착을 지원하는 거점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려 후기 잦은 왜적의 침입에 폐허로 방치되었던 순성진 일대는 진 설치 후 농경지 확보와 어업·제염업이 시작되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더불어 운하의 개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새로운 유민들이 대거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그러던 중 1448년(세종 30) 조정에서는 각 도에 영을 내려 유리하여 없어진 민호를 조사하고 본적지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당시 순성진에 거주하던 300여 호 중 104호가 이주 대상이었다. 그러나 당시 순성진을 관할하던 지군사 박홍문은 이를 그대로 시행할 경우 부세 수취의 급격한 감소로 진의 운영 자체에 차질이 빚어질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였다.

유민들 또한 이미 수 년 간 안정적으로 정착했던 곳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는 데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박홍문이 고을 사람 전 부사정 이숙(李熟)과 호장(戶長) 가택(賈宅) 등을 보내 도당(都堂)에 아뢰어 이 문제를 해결하였고, 이에 백성들이 감읍하였다고 한다.

순성진의 여러 사람들이 이와 같은 박홍문의 공적을 기리고자 집현전으로 신숙주를 찾아가 글을 부탁하였는데, 「태안군벽기」가 바로 그것이다. 신숙주는 「태안군벽기(泰安郡壁記)」에 순성진의 내력을 소개하고, 박홍문의 행적과 인품을 칭송한 후, 판에 새기고 벽에 걸어 잊지 않기를 당부하였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도순찰사 박강(朴薑) 등이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여러 진(鎭)과 포(浦)를 돌아본 후, 운영상 효율이 떨어지는 곳의 합속(合屬)을 청하였는데, 순성진도 이때 서산군에 포함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도 성이 퇴락하여 못쓰게 되었다고 표기되어 있어, 이미 16세기 초 이전부터 성과 진의 기능을 모두 상실한 것으로 확인된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06.25 내용 수정 굴포운하 관련 문장 윤문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