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백제 부흥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368
한자 百濟復興運動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정재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660년 7월연표보기 - 사비성 함락, 복신·도침·흑치상지 거병
종결 시기/일시 663년 8월연표보기 - 백강구[백촌강] 전투, 주류성·임존성 함락
특기 사항 시기/일시 660년 7월 18일연표보기 - 당군에 항복
성격 국권 회복 운동
관련 인물/단체 흑치상지|복신|도침|부여풍|지수신

[정의]

백제 멸망 이후 충청남도 서산 지역을 비롯한 백제 전역에서 발생한 국권 회복 운동.

[개설]

사비성이 함락된 직후 백제 각지에서는 나·당 연합군을 축출하기 위한 부흥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부흥 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로는 흑치상지(黑齒常之), 복신(福信), 도침(道琛), 부여풍(夫餘豊), 지수신(遲受信) 등을 들 수 있다. 초기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던 임존성(任存城)은 백제 수도였던 사비 지역으로부터 서북 방면에 위치하였다. 서북 방면에서의 활발한 백제 부흥 운동의 전개는 서산 지역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부흥 운동의 지도자였던 도침이 승려 출신이며, 서산이 백제 시대 서방의 중심지로서 많은 불교 유적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부흥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역사적 배경]

660년 당은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군대를 파병하여 산둥성[山東省] 동래로부터 황해를 횡단하여 덕적도에 도착하였다. 신라군 역시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대를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끄는 5천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당군은 기벌포를 지나 사비성 밖 20리 지점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곧 사비성을 점령하였다.

의자왕은 사비성 함락 직전 웅진성으로 피신하였으나, 660년 7월 18일 당군에 항복하였으며,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5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 고지에 대한 지배 야욕을 드러냈다. 그러나 당군이 주둔한 사비·웅진 지역 일부를 제외하고는 통치력이 미치지 못했다. 백제 부흥군은 나·당 연합군을 축출하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거병하였으며 순식간에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경과]

백제 부흥 운동은 지방의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흥기하였다.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 지역으로부터 서북 방면의 임존성, 구체적인 위치를 알 수 없는 주류성(周留城) 등이 중심지였다. 사비기 각 지방의 중심지였던 방성도 부흥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데, 동방의 득안성(得安城)과 중방의 고사비성(古沙比城) 등이 부흥군에 적극 가담하였다는 점은 기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따라서 서방성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서산 지역 역시 임존성과 더불어 백제 서북 방면의 부흥군의 주요 근거지로 활약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흑치상지가 임존성에서 거병하였을 때 10일 만에 3만여 명이 운집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서북 방면의 부흥군의 군세가 대단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승려 출신인 도침이 부흥 운동의 지도자였고 서산 지역의 가야산이 백제 불교의 성지였던 점을 고려하면 서산 지역에서도 부흥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661년 3월 두량윤성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이 결정적 승기를 잡고 부여풍이 귀국하자 왕으로 추대하고 당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여 사비성 및 웅진성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이때 백제 부흥군 지도자 간 내분으로 복신도침을 죽이고, 다시 부여풍을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부여풍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틈을 타서 당의 구원군과 신라군이 합세하여 파생적인 공격을 펼치자 백제 부흥군은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결과]

나·당 연합군이 부흥군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자 일본에서는 400여 척의 선박에 2만 7000여 명의 응원군을 보내 백제 부흥군과 합세하도록 하였다. 결국 663년 8월 백촌강구에서 백제·일본 연합군과 나·당 연합군이 최후의 전투를 벌인 결과 백제·일본 연합군이 대패하고, 주류성은 함락되었으며, 부여풍은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백제 부흥군의 주력이 궤멸된 가운데 임존성의 지수신이 최후까지 나·당 연합군의 공세에 항거하였으나, 당군에 항복한 흑치상지의 공격으로 임존성마저 함락되면서 3년간의 백제 부흥 운동은 종말을 고하였다. 백제 부흥 운동을 진압한 당은 백제 고지의 효율적 지배를 위해 왕자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고 웅진도독부 휘하에 7주 52현을 설치하였다. 이때 서산 지역은 지심주에 속하였으며, 평이현 등이 설치되었다.

[의의와 평가]

백제 부흥 운동은 외세의 침입에 맞서 자주성을 되찾기 위한 고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항쟁이다. 이 과정에서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 지역의 서북 방면에서 처음으로 백제 부흥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또한 최종적으로 나·당 연합군에 항거하다가 부흥 운동이 막을 내린 곳 역시 서북 지역이었다. 이는 서북 지역에서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서산 지역에 거주한 백제인들의 애국심과 자주성을 잘 보여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