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서산어민의 터전, 창리포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024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창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성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 서산군 부석면 창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서산군 부석면 창리에서 서산시 부석면 창리로 개편
포구 창리포구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창리 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천수만 안쪽 창리 해안에 위치한 포구.

[개설]

창리포구부석면의 남쪽 끝 해안에 위치한다. 동·서·남 3면은 천수만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 태안군 남면, 남쪽으로는 안면도와 마주보고 있다. 창리에 속한 자연 마을은 창말·목말·구장터 등이 있고, 부속 도서로 대섬·쏘아섬·닭섬·검조도·시루섬·토끼섬 등을 거느리고 있다. 창리포구는 본래 서산군 화변면의 지역으로서, 조선 시대 주사창(舟師倉)이 있으므로 창말 또는 창촌(倉村)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창리(倉里)라 하고 부석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천수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창리포구는 ‘서산 어민들의 터전’으로 회자될 만큼 어업의 비중이 높은 마을이다. 그러나 1980년대 초에 이루어진 서산AB지구방조제 간척 사업으로 인해 어족의 산란처인 황금 어장 천수만이 옛 자취를 잃어가면서 어로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리포구에서 오랫동안 고기잡이에 종사해 온 어민들은 어촌계 조직을 중심으로 변화된 어업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가두리 양식장과 외지인을 상대로 운영되는 낚시터가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창리포구의 어민들은 60여 척의 어선을 보유하고 있어 서산 지역에서 어로 활동이 가장 왕성하다.

창리포구를 상징하는 민속은 수백 년의 전통을 이어온 당제이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삼일[음력 1월 3일] 상당(上堂)인 산제당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내려와 하당(下堂)인 영신당과 장승, 샘 등을 돌며 각각 성대한 당제를 지냈다. 그러나 간척 사업과 더불어 산제당과 장승이 없어지고, 당제의 규모도 대폭 축소되어 어촌계 주관으로 풍어를 기원하는 영신제만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 후기 조기잡이와 연계된 창리포구의 영신제는 임경업(林慶業) 장군을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서해 도서 지역의 대표적인 ‘당굿형 동제’로서 전승되고 있다.

[거북선이 배치되었던 천수만의 요충지]

창리포구서산시청에서 남쪽으로 약 20㎞ 정도 떨어진 천수만의 해안에 자리한다. 서산 중심가에서 지방도 649호선을 따라 인지면부석면을 지나면 마룡리 언저리에서 가파른 고개를 만난다. 이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들면 비릿한 갯바람이 불어오는 바닷가에 창리포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창리포구는 남쪽으로 천수만을 사이에 두고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해룡이 잠을 자는 듯한 안면도와 마주보고 있고, 동쪽으로는 서산A지구방조제가 시작되는 지점에 간월도리와 접해 있다. 서쪽으로는 태안군 남면을 이어주는 서산B지구방조제로 통하는 길목이며, 북쪽으로는 서산과 태안의 경계를 이루는 부남호가 드넓은 담수호를 형성하고 있다.

창리포구는 조선 시대 주사창[수군의 무기를 보관하는 군기고(軍器庫)]이 자리했던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광해군 대에 선박 관리를 전담하는 주무 부서로 주사청이 설치되었으니, 창리포구의 주사창은 이에 부응하여 군선의 관리 및 무기를 보관하던 시설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당시 주사창의 규모는 대청 5칸, 군기고 13칸, 잡물고(雜物庫) 5칸이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창리의 공식 명칭은 왜현리(倭懸里)였다.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는 “주사창 15칸이 화변면 내 왜현리(倭懸里)에 있다.”라고 기록되었고, 1926년 편찬된 『서산군지(瑞山郡誌)』에는 “주사창 15칸이 화변면 왜현리에 있는데 지금의 부석면 창리이다.”라고 좀 더 자세히 부연하면서, “1896년에 모두 다 없어지고 부지 763.63㎡만이 남아 있다.”라고 했다. 이처럼 창리를 왜현리로 부른 까닭은 속언에 전하기를 서산군수 박시언이 이곳에서 왜구를 격파한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 『여지도서』를 비롯한 조선 후기의 읍지와 지리지에는 한결같이 왜현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18세기 중엽의 왜현리는 편호 56호에 남자 80명, 여자 78명이 거주하는 포구촌이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 초기인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목말[項村]과 창말을 아울러서 창리로 명명함으로써 비로소 본래의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창리포구의 주사창은 군기를 저장하는 창고일 뿐만 아니라 거북선과 병선이 주둔하는 수군 기지였다. 『여지도서』에 귀선(龜船)·방선(防船) 각 1척, 병선 1척, 하후선(何候船) 3척이 있다.’는 기록은 이를 잘 말해 준다. 즉 여기에서 귀선은 거북선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 서산 지역에도 거북선이 배치되었으니, 창리포구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 입지에 걸맞게 창리포구는 1970년대 초까지도 천수만 주변의 어촌과 섬마을을 잇는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른바 창말나루는 그 핵심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 이 나루는 창리에서 전담 뱃사공과 나룻배를 두고 운영했는데 인근에서 가장 번성한 나루였다. 왜냐하면 창말나루에 서산으로 가는 버스 종점이 있었을 뿐 아니라, 이곳이 홍성의 광천장과 부석면 취개장을 잇는 길목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두 장을 주로 이용했던 안면도 주민들은 창기리 우포(牛浦)[쇳개] 나루에서 창말나루를 거쳐 광천이나 서산, 홍성 등을 왕래하였다. 또 안면도의 부속 도서인 황도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별도의 나룻배가 있어 유사시 이 배를 타고 창리포구를 경유하였으며, 간월도창리포구를 잇는 나룻배도 수시로 운행되었다. 당시 창리포구에는 외지를 왕래하는 길손들을 대상으로 세 군데의 주막이 성업을 이루었다.

[창리포구의 전래 어업과 어로 민속]

인간의 간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의 천수만가로림만과 더불어 서해안 일원에서 가장 이름난 황금 어장이었다. 광활한 갯벌에서 나는 풍부한 해산물과 어족 자원은 고기잡이로 삶을 영위했던 어민들에게 천혜의 터전이 되었으니 그 대표적인 어업의 거점이 창리포구와 황도였다.

예나 지금이나 창리포구의 주민들은 어업이 주요 수입원이다. 과거에는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하여 근해에 어살을 놓아 숭어·농어·도미·장어·민어·우럭·도다리 등을 주로 잡았다. 닭섬 주위에는 그물을 달아 살을 먹이는 어살을 놓았으며, 대나무를 이용한 죽방렴(竹防簾)을 대섬에 매어 고기를 잡았다. 또 간척 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갯벌에 바지락이 많이 서식하여 제철에는 하루에 20톤 이상씩 수확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지금은 사라진 속칭 중선배로 불리던 안강망은 10여 명의 선주(船主)가 있었다. 중선배는 대형은 20~25톤 규모였다. 배는 선주가 자비를 들여 군산·목포 등의 조선소에서 건조하여 왔고, 10톤 정도의 소규모 선박은 안면도 창기리 백사장에서 만들기도 했다.

중선배가 조업을 나갈 때는 보통 7명이 승선을 한다. 선주가 뱃사람들을 고용하여 출항하는데, 책임자인 선장 이하 이물 사공, 기관장, 화장[고물 사공], 동사로 구성된다. 여기에서 이물 사공은 뱃머리에서 항해를 담당하는 자이고, 화장은 취사 담당, 동업을 한다는 뜻의 동사는 일반 선원들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흔히 ‘뱃동서’라고도 한다. 동사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을 ‘영좌’라 부른다. 뱃동서는 마을 사람뿐 아니라 인근의 안면도나 다른 지방의 사람들도 썼다. 과거에는 창리포구와 마주보고 있는 황도가 ‘배 사업의 본고장’이라 하여 안강망 어업이 가장 성황을 이루었는데, 그 시절에는 창리간월도에서도 많은 어민들이 황도로 건너가 중선배를 타기도 했다.

중선배는 전라도 칠산 앞바다에서 연평도에 이르기까지 먼 거리로 나아가 조업을 했다. 산란을 위해 남쪽에서 올라오는 조기 떼를 따라 이동하는데, 연평도는 입하 사리와 소만 사리 때 출발을 했다. 이동 경로는 창리에서 안흥~풍도~바깥~덕적도~연평도에 이르는데, 보통은 이틀이 걸리지만 바람만 좋으면 동력선과 비슷하게 하루만에도 도착할 수 있었다.

지난날 조기는 비단 창리뿐 아니라 서해안 어민들에게 황금 알을 낳는 다수확 어종이었다. 해마다 정초에 거행되는 창리포구의 당제와 영신당은 기실 조기잡이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창리포구의 동쪽 언덕에는 해묵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내는 제당이 자리한다. 바로 이곳이 조선 후기 서해안 일원에서 ‘조기의 신’이자 ‘풍어의 신’으로 급속히 부상한 임경업 장군 부부를 주신으로 모신 영신당이다. 제당에 오르면 그림 같은 포구의 절경이 아득하게 펼쳐지고, 사이좋게 마주한 안면도·황도가 손에 잡힐 듯 한눈에 들어온다.

창리포구의 어민들은 매년 어김없이 이 제당에 올라 임경업 장군에게 풍어를 기원한다. 비록 축소된 형태로나마 명맥을 이어오는 영신제가 그것이다. 창리의 영신제는 충청남도 서해안 도서 지역에서 손꼽히는 ‘무속형 동제’의 전형이다.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몇몇 당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당신앙’이 소멸되어 버린 오늘의 현실을 떠올리면 더없이 소중한 문화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바다 목장 사업으로 활로를 찾는 창리포구]

창리포구는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어왔다. 무엇보다 1980년대에 이루어진 서산AB지구방조제 간척 사업은 수백 년 동안 유지되어 온 풍요로운 삶의 터전과 어촌 공동체를 송두리째 앗아가는 단초가 되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1980년대 초 서산 방조제 건설에 거대 자본의 이해와 논리가 크게 작용하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결과 최소한의 환경 영향 평가나 어민들의 생계에 대한 고려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일사천리로 물막이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대대로 내려온 황금 어장 천수만 갯벌이 뭍으로 변하여 어업 생산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 담수호의 방류에 따른 바닷물 염분 농도의 저하, 환경 오염, 조류 흐름의 변화 등은 천수만 해안 생태계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갯벌이 사라지면서 바지락·굴·해태 등 어패류 양식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그나마 남아 있는 어장도 크게 오염되어 종패를 뿌려도 대부분 폐사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정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심해져 천수만에서 서식하는 토종 물고기조차 자취를 감추는 것은 물론, 회유성 어류들도 더 이상 천수만을 찾지 않게 되었다. 간척 이후 개흙이 쌓이면서 한때 새조개가 번성하기도 했으나 이마저도 구경하기 힘들다.

이처럼 열악한 어업 환경 속에서도 창리포구의 어민들은 천수만 일대에서 여전히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현재 포구에는 60여 척의 어선들이 있다. 이는 서산 지역에서 가장 많은 어선 보유량이지만, 멸치잡이 3척을 제외하면 모두 천수만 내에서 고기를 잡는 1~2톤 규모의 소형 선박들이다. 어민들은 조업이 시작되는 봄에는 광어·꽃게·숭어·농어를, 가을에는 전어를 주로 잡고 있지만 그 양은 예전에 비하면 견줄 바가 못 된다. 이밖에 다양한 잡어들을 어획하여 판매하고 있으나 어족 자원의 고갈로 인해 별반 소득이 없는 실정이다.

창리포구의 어촌계는 현재 약 60여 명으로 조직되어 있다. 창리 전체 세대의 1/3이 어촌계에 가입된 셈인데, 바닷가에 위치한 창말을 중심으로 예부터 어업에 종사했던 주민과 그 후손들에게 입회 자격이 주어진다. 어촌계는 매년 영신제를 주관하고 어장 관리를 전담한다. 토끼섬 너머에 새롭게 양식을 시작한 바지락은 어느 정도 안착이 되었지만 굴은 실패로 돌아갔다. 최근엔 그나마 버팀목인 바지락 어장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애써 종패를 뿌려도 폐사율이 높을 뿐 아니라 잘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촌 계원 가운데 36세대는 4.75㏊의 면적을 분배하여 가두리 양식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중에서 15세대는 외지인을 상대로 낚시업을 겸한다. 이는 1인당 3~4만 원의 입장료를 받고 오전 7시에서 오후 5시까지 가두리 양식장을 낚시터로 대여해 주는 사업인데, 최근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에 거주하는 낚시꾼들에게 인기가 높다. 이와 함께 창리포구 주변에는 횟집과 민박, 펜션 등이 서서히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창리포구의 어민들이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사업은 간월도리와 함께할 바다 목장이다. 이 사업은 포구 앞바다에 펜션식 낚시 타운을 조성하고 인공 수초 투하, 어촌 체험 프로그램 개발 등을 골자로, 서산시의 지원을 받아 향후 5개년 간 추진될 예정이다. 사방이 섬과 뭍으로 가로막힌 창리포구는 파도와 바람이 잔잔하여 가두리 양식 및 이를 활용한 해상 펜션의 최적지로 손꼽힌다. 게다가 서해안고속국도의 건설로 접근성이 좋아 장차 창리포구를 활성화시킬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