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023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강성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매년 음력 1월 15일 - 간월도 굴부르기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충청남도 태안군 안상면 재편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충청남도 서산군 안면면 간월도리 재편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3년 7월 1일연표보기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재편
제의 장소 간월도 굴부르기제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풍어기념탑지도보기

[개설]

간월도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포구 마을이다. 본래는 천수만 내에서 안면도에 딸린 황도와 더불어 가장 큰 섬이었다. 그러나 1982년 10월 26일 물막이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대대로 갯가에 의지하여 살아온 간월도는 뭍으로 변했다. 가구 수는 80여 호에 250여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자연 마을로는 큰말·벗말·달박골·갱말 등이 있다. 이 가운데 30여 호가 거주하는 큰말은 간월도의 중심지로서 부석초등학교 분교가 자리한다.

예나 지금이나 간월도를 대표하는 특산품은 어리굴젓이다. 간월도 어리굴젓은 조선 시대 임금에게 진상되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을 만큼 전국에서 이름난 특산물이다. 현재 마을 내에는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무학표 어리굴젓을 비롯한 세 개의 생산 라인이 있으며, 곳곳에는 어리굴젓 매장과 이를 특화한 음식점이 성업 중이다. 또한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에 부녀자들이 주관하는 굴부르기 행사를 갖는다.

어리굴젓과 더불어 간월도의 상징은 원통 모양의 바위섬인 원통대(圓通臺)에 사뿐히 내려앉은 간월암(看月庵)이다.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광을 지닌 간월암은 조선 전기 왕사(王師) 무학대사(無學大師)[1327~1405]가 거처하며 수도를 했던 곳으로, 무학과 관련된 다양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오랜 역사의 숨결이 녹아 있는 간월도]

간월도란 지명은 암자에서 수도에 정진하던 무학대사가 바닷물에 비친 달을 보고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이름을 지은 간월암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일 뿐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간월도란 이름은 ‘서산’이란 군호(郡號)보다 오래된 지명으로서 이미 고려 시대부터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간월도에는 일찍이 서산을 대표하는 두 명의 인물이 살았다. 서산 정씨의 시조인 원외랑 정신보(鄭臣保)[?~1261]는 자신의 조국이었던 송나라가 원에 의해 멸망하자 간월도로 망명하여 정착하였다. 또한 간월도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 정인경(鄭仁卿)[1267~1305]의 공로로 운주에 예속되었던 서산은 비로소 서주군으로 복군이 되었다. 따라서 간월도는 서산의 옛 지명인 서주(西州)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용되어 온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간월도는 서산군 화변면에 속한 마을이었다.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당시 간월도는 편호 48호에 남자 85명, 여자 73명이 거주하는 어촌이었다. 1895년(고종 32)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태안군 안상면[현 안면도]으로 재편되었다가, 1914년 다시 서산군 안면면 간월도리가 되었다. 이후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에 의해 안면면의 관할 구역에서 부석면 간월도리로 재편되었다.

서산에서 가장 오래된 읍지인 『호산록(湖山錄)』에는 초야에 사는 몽년(蒙年)이란 선비가 간월도에 무인절경의 연못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정자를 지어 살 것을 생각하고 찾아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책에는 당시 몽년이 본 광경을 “천년 된 고목 100여 그루가 하늘을 닿을 듯하고, 등나무의 넝쿨이 나무 위를 덮고 있어서 해가 보이지 않고 인적이 끊어졌다.”고 묘사하고 있다. 또 “등나무 한복판에는 옛 기와 800여 장이 쌓여 있고, 고려 때 정인경이 지은 황폐한 초당의 옛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16세기 후반까지도 간월암 주변은 태고의 원시림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었고, 그 속에 초당이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조안방(趙安邦)이란 사람이 판관[종 5품]이 되어 초당을 찾아갔는데 도리 위에 걸린 현판에 ‘낙가산원통대(落伽山圓通臺)’란 여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 10년 후에 다시 가보니 현판 한쪽은 없어지고 승려 한 분이 다가와서 말하기를 “가야산의 기맥과 정신이 모두 이 섬에 모였기 때문에 이 섬에서 세 성인이 나온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처럼 절경을 자랑하는 원통대는 천하의 길지로 인식되어 이곳을 찾으려는 시인 묵객과 지사들의 발길이 끓이지 않았던 명소였다.

[임금에게 진상되었던 간월도 어리굴젓]

간척 사업이 진행되기 전까지 간월도 주민은 갯벌에서 나는 굴·낙지 등의 해산물을 채취하여 삶을 영위했다. 특히 굴은 간월도 사람이 “예전에는 굴 따먹고 살았다.”고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어족 자원이었다. 그래서 음력 8월 보름[추석]부터 이듬해 뻐꾹새가 울 때[음력 4월]까지 온 마을 여자들은 갯가로 나아가 굴 채취에 여념이 없었다. 일찍이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간월도만의 굴젓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간월도에서 굴을 채취하는 일은 전적으로 여자들의 몫이었다. 굴이 많이 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에 전승되는 굴부르기는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굴부르기와는 별도로 정월 초삼일[음력 1월 3일]이 되면 정결한 당주와 화주를 선정하여 어선의 안전 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당제를 모셨다. 그러나 간척 사업으로 당산이 없어진 뒤로 시들해져 1996년을 끝으로 중단되고, 간월암에 의뢰하여 몇 해 동안 명맥을 이어오다가 역시 중단된 상태이다. 굴부르기제가 여성들이 주관하는 제의이자 축제라면, 당제는 서해 도서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전승되었던 남성들의 의례이자 축제였다. 간월도에서는 서산시의 지원을 받아 당집을 신축하는 한편, 2012년부터 당제와 굴부르기를 연계하여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흔히 어리굴젓의 어원에 대하여 고춧가루를 넣어 먹으면 혓바닥이 어리해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 와전된 것이다. 냉장 시설이 없던 시절에 굴젓은 늦여름까지 먹기 위해 짜게 담는 것과 덜 짜게 담는 젓 두 종류가 있는데, 후자인 어리굴젓은 짜지 않게 저린 ‘얼저린 굴젓’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간월도 어리굴젓은 간월암에서 도를 닦던 무학대사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1335~1408]에게 진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조선 시대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처럼 간월도 어리굴젓이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천수만의 독특한 자연 환경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즉 간월도의 굴 밭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고 하루에 7~8시간씩 내려 쬐는 태양열로 어패류가 서식하기에 적당한 수온이 유지되고 있다. 볕을 많이 받는 까닭에 일정한 크기로 자라면 성장이 멈추어 여느 굴보다 작고 날감지[주변의 터럭]가 발달된 것이 특징이다. 또한 굴이 잘 자라려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야 하는데 해미산과 가야산에서 발원한 하천의 물이 흘러들어 굴의 성장에 안성맞춤이다.

간월도의 굴은 전래 토종굴인 토화와 양식굴인 석화로 나뉜다. 토화는 빛깔이 가무스름하고 알이 작지만 물날개가 잔잔하고 그 수효가 많다. 이 토화는 날감지가 많아 고춧가루와 배합할 때 양념을 잘 먹어 독특한 맛을 낸다. 가령 간월도 굴젓과 제조법이 전혀 다른 웅도의 어리굴젓은 고춧가루에 버무렸을 때 알이 커서 희끗희끗하다. 반면에 간월도 굴은 알이 잘고 날개가 커서 버무림에 적절하고 잘 발효되는 것이 특징이다.

간월도 어리굴젓은 전성기 때의 생산량은 100여 톤에 이르러 전국 생산량의 90% 가량을 차지했다. 그러나 1982년 간척 사업이 진행되면서 천혜의 굴 밭은 거의 대부분이 사라졌다. 4년이 넘는 동안 간척 사업장에서 품을 팔면서 어렵사리 살아가던 주민들이 다시 굴 밭을 찾은 것은 1985년 무렵이다. 간월도 남쪽 갯벌에서 굴의 생육이 발견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86년 초부터 당시 이장과 어촌 계장을 중심으로 어선 20여 척을 동원하여 마을 앞 갯벌에 굴의 생육에 필수적인 돌들을 1개월 동안 투석하였다. 그 결과 양식장 15㏊와 자연 굴 밭 30㏊를 조성하는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1988년부터 굴을 조금씩 채취할 수 있게 되었고, 이곳에서 채취한 굴은 어촌계에서 직영하는 공장에 전량 납품되어 ‘무학표 어리굴젓’이란 상표로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무학대사의 전설이 서린 간월암]

간월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은 원통대 위에 지은 간월암이다. 본래 원통대는 간월도 남쪽 끝자락에 좌정한 작은 섬이었으나, 천수만 방조제가 들어서면서 뭍으로 연결되어 썰물 때는 걸어서도 왕래할 수 있다. 이 절은 무학대사와의 인연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구전에 따르면 애당초 무학이 머물렀던 절은 안면도[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젓개[傍浦] 북쪽이었다. 젓개 곁에는 자그마한 산이 솟아 있는데 그 중턱에 무학이 수도를 했던 절이 있었다. 그런데 절을 지은 뒤 이곳을 지나가는 선박이 암초에 걸려서 좌초되는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그 까닭은 악천후에 포구 앞을 지나가던 선박이 무학의 절에 켜진 불빛을 보고 등대로 착각하여 불빛을 따라 항해하다가 암초에 부딪친 것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무학은 절을 버리고 간월도로 옮겨 갔고, 그 뒤로는 배들이 암초에 걸리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와 같이 간월암은 안면도에서 옮겨온 무학이 수도를 위해 창건한 사찰로 구전되고 있지만 기록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가 학인된 것은 아니다. 『호산록』의 기록을 보면 조선 후기에도 사찰이 존재했음은 분명한데 폐사된 시기는 알 수 없다. 일제 강점기에는 예산 수덕사를 중흥시킨 만공(滿空)[1871~1946] 스님이 이곳에 절을 세우기 위해 여러 차례 간월도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는 이미 안면도에 사는 사람이 묏자리로 길지라는 풍수설을 믿고 조상의 묘를 쓴 상태였다. 그래서 당시 서산군수 박동래와 안면 면장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묘를 다른 곳으로 이장시키고 1941년 지금과 같이 암자를 세웠다.

간월도에는 숱한 무학대사의 자취가 서려 있다. 간월도에서 굴을 따서 연명하던 여인이 낳은 아들이 무학이라는 출생담이 바로 「학이 날개로 보호한 어린아이」이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옛날에 간월도에 살던 한 여인이 임신을 한 채 홀로 되었다. 생활이 어려웠던 여인은 서산장으로 굴을 팔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인이 인지면에 이르렀을 때 산기가 있어 풀밭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다. 여인이 아기를 눕혀 놓고 굴을 팔고 급히 와서 보니 학이 날개로 어린아이를 덮어 보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무학이라 지었다는 것이다. 무학은 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시다가 돌아가신 뒤에 중이 되었다고 한다. 또 무학은 자란 후에 토굴에 기거하며 도를 닦았는데, 달을 보고 문득 도를 깨달았다 하여 그 섬을 간월도라 했다고 한다.

쌀바위에 얽힌 전설인 「쌀 나오는 구멍」도 흥미롭다. 무학대사는 동자 하나를 데리고 수도를 할 때 쌀이 나오는 구멍에서 쌀을 받아먹으며 지냈다. 그런데 대사가 간월도를 떠난 후에 다른 중이 와서 보니 구멍에서 나오는 쌀이 너무 적었다. 중은 쌀이 적게 나오는 것은 구멍이 작기 때문이라고 여겨 그 구멍을 크게 팠다. 그러자 이제부터는 쌀은 나오지 않고 물이 흐르게 되어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았다.

한편 「간월암 유래」 이야기에서는 무학대사가 떠날 때 생생한 나무 하나를 잘라 꽂으며 동자에게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고, 나무가 죽거든 내가 죽은 줄 알라.”라고 이른 뒤에 떠났다고 한다. 그 나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는데, 수백 년이 지나서 다시 잎이 난 적이 있다고 한다.

[서산 관광의 상징으로 거듭나는 간월도]

최근 간월도에서는 관광 단지 조성 및 어리굴젓 명품화 사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충청남도에서 실시하는 향토 자원 명품화 사업은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사업은 서산의 간월도 어리굴젓, 홍성의 토굴 새우젓 등 9개 시군에서 10종의 향토 자원의 명품화를 기치로 내걸고 예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서산시는 어리굴젓의 명품화를 위해 2013년까지 29억 9500만 원을 투자해 가공·유통·판매 시설과 쇼핑몰 구축, 체험 관광 프로그램 개발, 지식 재산권 확보 등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간척 사업 이후 침체기를 맞이했던 간월도 어리굴젓이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와 더불어 주목되는 것은 간월도 관광 단지 사업이다. 서산시에서 추진하는 이 사업은 총면적 5만 8790㎡, 사업비 777억 원을 투입하여 해수 워터파크[관광 휴양 시설], 숙박 시설, 삼림욕장, 문화 시설을 갖춘 종합 휴양 관광지를 목적으로 부지를 분양 중에 있다. 관광 단지가 예정대로 연착륙한다면 간월도는 바야흐로 서산 관광의 메카로 부상할 전망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