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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010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용호

[개설]

한우(韓牛)는 한국의 고유 소 품종으로, 몸무게는 대개 암소가 300㎏, 수소가 420㎏ 정도이다. 털의 빛깔은 노란빛을 띤 갈색이다. 체질이 강건하여 병에 잘 걸리지 않으며, 성질이 온순하다. 또한 다리와 발굽이 튼튼하고, 동작이 경쾌하여 일을 잘 한다. 거친 사육 관리에 잘 견디며, 관리만 잘 하면 번식력도 좋은 편이고, 피부가 튼튼하여 좋은 가죽이 생산된다. 그러나 체격이 고르지 못하고 특히 뒷몸이 빈약하며, 다리와 발굽의 모양이 좋지 못하다. 성장 발육이 더디며, 젖이 분비되어 나오는 양이 적고, 젖꼭지도 작은 것이 결점이다.

예로부터 농사를 가장 중히 여겼던 우리나라에서 한우는 농경·운반·퇴비 등을 위하여 사육되었으며, 죽어서는 고기와 가죽을 남기니 농가에서는 매우 귀중한 재산으로 여겨 왔다. 한우는 일소로서 순수하게 번식되어 세계적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산업의 발달로 농업의 기계화가 추진되면서 일소로서보다는 고기소로서의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고, 인공유의 개발로 사육 기간도 종전보다 더 앞당기게 되었으며, 살이 찌면 육질이 더욱 개량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토종 한우는 털색에 따라 황소, 칡소, 흑소로 나누어진다.

[워낭 소리 5천 년 역사를 이끌다]

2008년 크게 화제를 모았던 「워낭소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그 영화의 내용은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한 노인과 30년을 함께한 소의 이야기였다. 수명을 뛰어넘어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친구, 말이 통하지 않지만 유대감으로 주인을 지탱해주는 존재로 등장하는 소와 늙은 농부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였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그 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소, 즉 한우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한우가 언제부터 한국인과 함께 해왔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개 역사 시대 이전부터 우리 조상들의 주요 식량원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만년 중에 절반의 시간은 한우가 한국인과 친구가 되기 위한 시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열전 부여조에는 가축의 명칭을 가진 부여의 관직명이 보이는데 이 가운데 ‘우가(牛加)’가 등장하고 있다. 적어도 이때부터는 한우가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가축이 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지』 위지 동이열전 한조에도 “소나 말을 탈줄 모르고, 장사 지내는데 모두 써버린다[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는 기록이 있어 제사에 바치는 제물로 일찍이 한우가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삼국 시대에 들어서 한우는 쓰임새가 크게 증가하였다. 수전 농업의 발달로 우경이 본격화되는가 하면 운송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 중 안악3호분의 행렬도에는 소가 왕으로 보이는 주인공의 수레를 끌고 있으며, 외양간에는 여러 마리의 소가 사육되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때부터는 한우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시도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백제에는 육부(肉部)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한우의 쓰임새가 늘어남과 동시에 한우는 한국인의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전의서나 우의방 등을 통해 한우의 관리 및 질병 치료가 이루어졌으며, 이때부터 한우를 기르는 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는 조선 시대에도 계속 이어져 사축서를 통해 소의 관리가 이루어지고 세조 때는 양우법에 관한 서적을 편찬하여 좋은 소의 증식을 꾀하였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한 한우는 우리 조상의 생활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지금도 전해져오는 「황희 정승과 누런 소와 검은 소」 이야기나 소싸움 등의 민속놀이도 생겨났다. 또한 소는 농사에서 집안의 노동력을 대신할 뿐만 아니라 단백질 공급원으로서도 큰 재산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나라에서 주최하는 여러 행사의 부상으로 황소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개항기에는 서양의 목우법을 도입하여 근대적인 한우 개량 및 관리를 시도하였으나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자주적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은 한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였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체격이 크고 거친 사료에 강하다. 둘째, 역용우[일소]로서 영리하고 성질이 온순하며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셋째, 환경 적응 능력이 뛰어나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총독부에서는 우수한 종모우를 보호하고, 이를 통해 개량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제의 정책은 일본의 한우 수탈 과정의 하나로써 세계 대공황 당시 일본의 불황 타계를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거나 군용마를 대체하여 운송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였다. 또한, 한우의 여러 종 중 황색모의 종만 살아남는 폐해가 생겨났다. 이렇게 해서 일제 강점기 동안 150여 만두 이상의 한우가 반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인의 아픈 역사를 한우도 함께 하였던 것이다.

서산 지역이 본격적으로 한우 보존 및 개량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해방 이후였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농촌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한우를 통해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식용으로서의 한우의 가치가 증대되어 육용종 중심의 개량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서산 지역은 전통 시대부터 국마를 키우는 목장으로 유명하였기에 한우 육성에 있어서도 천혜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1969년 군사 정권의 실력자였던 김종필(金鍾泌)이 삼화축산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한우 보존 및 개량에 첫 발을 내딛었다. 이후 축협중앙회 서산목장, 축협중앙회 한우개량사업소,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사업소, 농협중앙회 한우개량사업소를 거쳐 2011년 1월 현재의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원이 탄생하였다. 현재 서산 지역의 천혜의 환경과 가축개량원의 체계적인 관리 아래에 탄생한 우수한 한우는 전국의 한우의 종모우, 즉 아버지가 되고 있다.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원의 명품 한우 만들기]

1960년부터 시작된 경제 개발 계획으로 인한 산업화의 바람은 농촌이 아닌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농업이 아닌 2·3차 산업에 종사하였고, 전통 시대의 농업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었다. 이와 함께 한우의 쓰임새도 점차 변하였다. 오천년 역사를 이끌어왔던 한우의 힘은 운송 수단으로서도 농업의 동력으로서도 점차 그 가치가 퇴색되었다. 대신 우수한 육질과 그 어떤 육류와도 비교되지 않을 만한 영양분은 식품으로서 한우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하였다. 그 과정에서 1969년 서산 지역에 삼화축산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이후 축협 등을 거쳐 정부에서 관리하는 최대의 목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원의 한우개량사업소에서는 세계의 다른 어느 지역의 육우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우수한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한우를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한편 우수한 소의 품종을 특별 관리해 왔다.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원의 한우 육성 사업은 우수 한우씨수소 검정·선발과 그 씨수소 정액의 농가 보급이라는 두 부분으로 크게 구분해볼 수 있다.

먼저, 우량 한우 씨수소 검정·선발은 1980년대 무렵 한우 순수 개량 사업의 시작과 함께 진행되었다. 한우의 개량을 위해서는 우수한 한우를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이에 1985년부터 1988년까지 한우 후대 검정 사업으로 전국에서 육량이 우수한 보증 씨수소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러 육량 중심의 개량 방향을 육량과 육질을 함께 개선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전환하였다.

1992년 당대 검정을 통해 선발된 상위 10%의 후보씨수소를 선정하고, 이들에 대한 후대 검정을 통해 총 112두의 씨수소를 확보하였다. 1997년 축산과학원과 도종축장에서 수행하던 당대 검정 업무가 농협 한우개량사업소로 이관되면서 가축개량원이 전국 한우의 고향으로 본격적으로 부상하였다. 2003년에는 한우 후대 검정까지 실시하게 되면서 한우 개량 및 관리에 관한 한국 최고의 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지속적인 한우 개량과 더불어 2007년에 실시한 제13차 한우 개량 추세 조사 결과 18개월 령 비거세우 한우의 체중이 552.8㎏으로 전국 평균 체중을 처음 측정한 1974년의 289.6㎏보다 약 두 배가 증가할 정도로 엄청난 양적 성장을 가져왔다. 또한 체중 증가뿐만 아니라 육질 개선에도 주력하여 2008년의 전국 1등급 출현율이 53.7%로 1995년의 12.8%보다 무려 4.2배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씨수소 정액의 농가 보급 정책이다. 한우 씨수소의 검정 및 선발은 최종적으로 우리 농가의 소득 증대와 한우 관리의 효율성을 도모하기 위한 사전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한우의 체중과 육질의 등급은 한우 농가의 수입과 직결된다. 따라서 엄정한 심사를 통해 선발된 보증 씨수소의 정액을 농가에서 보급 받음으로써 차후 육우 과정에서의 불완전성을 낮추고 우수한 명품 한우로 성장할 가능성을 극대화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최근 20여 년간 18개월 령 수소 한우의 체중은 평균적으로 매년 24.8㎏씩 증가했으며, 1등급 한우의 출현율은 매년 3.3%씩 증가하여 실질적으로 농가의 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서산 지역은 예로부터 풍요로운 자연환경이 담보된 고장으로 낮은 구릉과 들판이 펼쳐져 있어 목장을 운영하는데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원의 전신인 삼화축산주식회사가 서산 지역에 자리하게 된 것 역시 정치적인 고려와 더불어 실제 서산 지역이 목장으로 훌륭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다.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원에서 우수한 한우를 개량·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원 구성원의 노력과 서산 지역의 청정한 자연환경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미국 쇠고기·구제역, 보이지 않는 한우의 투쟁]

2001년 쇠고기 수입 자율화 조치로 한우는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미국·캐나다 등의 기업화된 쇠고기 회사와 몇 마리를 키워 농가의 부 수익을 올리던 한우 농가가 애초에 경쟁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것이었다. 한우 농가의 시름은 점차 깊어만 갔다.

그런데 2003년 캐나다와 미국에서 연달아 광우병이 발생하였다. 광우병은 소해면상뇌증으로 소 먹이로 육골분을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질병이다. 문제는 소해면상뇌증이 걸린 소의 고기를 사람이 먹으면 새로운 변종의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을 일으키는데, 치료제가 없고 대부분이 사망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북미 지역에서의 쇠고기 수입은 다시 전면 중단되었다. 이러한 사태와 함께 우리나라의 한우 농가에서도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원의 전신이었던 한우개량사업소에서도 우수한 한우 육성에 박차를 가하였다. 2005년 한우 개량 개선 대책의 일환으로 한우 육종 농가 육성 사업을 도입하여 암소 농장 검정을 실시하였다. 우수한 한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수소도 중요하지만 어미의 능력 또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종전의 씨수소 위주의 개량에서 암소의 능력을 검정하여 보다 우수한 송아지를 생산하고 검정함으로써 개량의 성과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2008년 미국의 쇠고기 수입 압력이 다시 높아지는 가운데 한국과 미국은 쇠고기 협상에 돌입하였다. 그 결과 종전보다 검역 절차가 간편해지고, 30개월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허용되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광우병 이력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였다.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촛불을 손에 들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불안감을 토로하였다. 이른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파동으로 인한 ‘촛불 시위’가 발생한 것이었다.

농민들 역시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협상 능력을 비판하였다. 기존의 북미 지역에서의 쇠고기 수입 중단이 광우병에 의한 것이었음에도 오히려 검역을 간소화하였고, 30개월 이상의 광우병 발발 위험이 높은 연령대의 쇠고기를 수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기 보다는 잠재우는데 급급하였다.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은 바로 한우 농가의 수입 감소로 이어졌다. 국내외 경제 불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저렴한 미국산 쇠고기의 유통으로 한우 농가가 직격탄을 맞게 된 것이다. 2003년 광우병 발생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 금지 조치가 이루어진 후 나름의 경쟁력 확보에 박차를 가했으나 정부의 관대한 협상의 결과 이전보다 더 어려워진 격이었다.

일부 한우 농가에서는 한우 사육을 포기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0년 겨울에는 구제역이 발생하였다. 자식들처럼 돌보던 소를 산채로 땅에 파묻어야 했던 전국의 한우 농가에서는 자살하는 농민을 비롯하여 통곡의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구제역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매몰을 담당했던 관계 부처의 공무원 일부는 심리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참혹한 모습이었다.

구제역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을 무렵 서산시에 위치한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원에서는 방역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전국으로 보급될 한우의 종우를 보관하고 있는 서산 지역은 절대로 구제역이 미쳐서는 안 될 성역과도 같은 곳이었다. 한우개량사업소의 직원들은 구제역 전염을 피하고자 구제역이 창궐하는 동안 사업소에서 숙식을 하며 지난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 결과, 전국 대부분 지역이 구제역으로 몸살을 앓았지만 서산 지역에서는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1년 봄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원에서는 한우 농가를 살리기 위한 종우의 보급이 다시 이루어졌다. 살아남은 암소들은 다시 건강하게 후세를 잉태하였고, 이들은 또다시 우수한 한우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앞으로 이들 한우와 한우 농가가 나아가야 할 길은 여전히 너무 멀다. 미국산 쇠고기, 구제역과 같은 질병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투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원이 한우의 경쟁력 확보와 보전을 위해 앞서서 노력하고 있기에 한국인의 소, 한우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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