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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005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윤용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134년 7월연표보기 - 운하 착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69년연표보기 - 운하 완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95년연표보기 - 경상도 조선(漕船) 16척 침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14년연표보기 - 전라도 조선(漕船) 66척 침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55년연표보기 - 전라도 조운선 54척 침몰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7년연표보기 - 태안군 안흥 앞바다 고려 침몰선 수중 발굴
소재지 굴포운하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
소재지 굴포운하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개설]

2010년 이후 이른바 ‘4대강 사업’으로 운하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연안 해로를 중요한 교통로로서 사용해왔던 만큼 운하의 필요성이 높지 않았다. 그런데도 일찍이 태안반도에 운하를 개착한 것은 매우 특이한 사건이었다고 할 만하다. 운하 건설은 1134년(인종 2)에 처음 시작되어 1669년(현종 10)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서산의 조운(漕運) 유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교통사적 또는 경제사적 유적이라 할만하다. 서산 지역에서의 운하 건설의 필요성은 고려 시대 이후 중앙과 지방을 잇는 조운 시스템의 구축에서 비롯되었다. 992년(성종 11)에 실시된 조운 제도는 중앙 집권 체제의 경제적 구현이었다고 할만하다. 조운 제도는 각 지역에서 징수한 막대한 세곡과 공물을 중앙으로 체계적으로 수송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천수만과 가로림만 연결하기]

서산 지역에 운하가 그토록 절실히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2007년 이후 태안군의 안흥 앞바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고려 침몰선에 대한 수중 발굴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수 백 년에 걸쳐 운하에 집착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태안반도의 안흥 앞바다가 삼남 지방으로부터 올라오는 거의 대부분의 물류가 조운되는 주요 통행로였으나 조운선의 해난 사고가 잦았다. 이런 이유로 운하 굴착을 모색하게 되었다.

태안반도 연안 조운로 상의 안흥량(安興梁)은 특히 험로로 정평이 났었다. 격한 물살, 빈번한 안개, 그리고 암초가 많아 항해의 안전을 저해하였다. 이로 인한 조운선의 빈번한 사고는 고려 시대 조운 제도가 시작되면서부터 문제가 되었다. 12세기에 세곡선은 아니었지만 조운로를 통해 개경의 최대경(崔大卿) 댁으로 운송되던 청자선이 태안반도 안흥량 부근에서 침몰했던 것도 이 같은 해난 사고의 일부였다.

이후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1395년(태조 4)에 경상도의 조선(漕船) 16척이 침몰했고, 1414년(태종 14)에 전라도 조선(漕船) 66척이 침몰하여 200여 명의 익사와 함께 미곡 5,800석을 잃었으며, 1455년(세조 원년)에도 전라도 조운선 54척이 침몰하는 등 이 지역에서 여전히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처럼 빈번했던 안흥량의 사고를 극복하기 위해 제기된 방안이 오늘의 서산시와 태안군의 경계 지점인 태안반도의 허리를 잘라 남쪽의 천수만과 북쪽의 가로림만을 연결하는 운하의 건설이었다.

[천신만고, 공사의 여정]

운하 건설 논의는 12세기 고려 숙종·예종 대에 처음 제기되었으나, 실제로 운하 개착이 강력히 추진된 것은 1134년(인종 12) 7월의 일이었다. 인종이 측근 신료인 정습명(鄭襲明)을 현지에 파견하여 공사를 감독케 하고 태안 및 인근 지역에서 수천 명의 인력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막상 공사를 진행하면서 예상과는 다른 문제가 노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인종 대의 공사는 약 4㎞[10여 리]를 굴착하여 2.8㎞[7리] 정도가 남겨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공정의 2/3 정도가 진행되었던 셈이다. 버려졌던 운하 공사 현장은 150년 후인 고려 말인 1391년(공양왕 3)에 왕강(王康)의 건의에 따라 재개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대의 두 번째의 시도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지하에 깔린 암반층 문제, 그리고 굴착부분을 뒤덮는 갯벌 등의 문제를 기술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한계 때문이었다.

고려 시대에 이루지 못한 태안반도 운하 개착 프로젝트는 이제 조선 시대로 넘겨졌다. 조선 왕조의 개창으로 도읍은 한양으로 옮겨졌지만, 조운의 조건은 고려 시대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1413년(태종 13) 재개된 공사에 의하여 태안반도의 운하는 물길을 통하는데 일단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공사는 갑문식(閘門式) 설계에 의한 공사였다.

일단 준공을 보았지만, 고육책으로 성사시킨 갑문식 스타일의 운하는 실제 그 기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저수지의 규모가 작아 배를 움직이는 것이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운선이 직접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화물을 여러 차례 작은 배로 옮겨 실으면서 운하를 통과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경제적 효용성이 크지 않았다. 그마저도 조수간만의 차로 인하여 선박의 통행 시간까지 크게 제한 받았다.

운하의 경제적 편의성이 사실상 미미한 것으로 판명되자 고육지책의 다른 방안이 떠올랐다. 천수만 연안에서 화물을 내려 육로를 이용, 북쪽으로 옮기고 이를 가로림만에서 다시 선박으로 옮겨 실어 서울로 운송하는 이른바 ‘설창육수안(設倉陸輸案)’이 그것이다. 이는 운하 굴착 프로그램의 실패를 의미하는 대안이었다. 세조 이후 끊임없이 논의되던 이 방안은 17세기 현종 대에 송시열(宋時烈)의 열성으로 인해 사업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렇게 해서 남북 양측에 세곡 등의 화물 운송을 돕는 창고를 건설하고 세곡 운송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안정적으로 운용하기에는 여전히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아 이 사업 역시 지속되지 못하였다.

운하 개착의 필요성이 충분하였고 아이디어도 기발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성공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실제 작업의 과정에서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안흥량 사고를 극복하기 위한 운하 개착 사업은 조선 시대까지 되풀이되어 이어졌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국가 프로젝트가 되었다.

[대접받지 못하는 운하 유적]

공사 구간 중 가장 난공사였던 곳은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어송리 일대 구릉지의 굴착이었다. 몇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이 구간에는 아직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이 운하 유적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낙타 등처럼 솟아오른 팔봉산 봉우리가 눈앞에 떠오른다. 작업에 투입되었던 인부들도 손을 쉴 때면 필시 굽이굽이 펼쳐진 팔봉산 봉우리를 쳐다보며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서산의 이 운하 유적이 아직까지 문화 유적으로서 대접을 못 받고 있다는 점이다. 운하 유적에는 다른 어느 곳보다 큰 안내판이 세워져 당시의 사적(史跡)을 상세히 적어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 유적으로서 지정은 되어 있지 않다. 그 역사적 가치를 아직 인식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문화재 지정에 따른 번거로움을 우려한 우리의 나태함 때문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지 다 우리의 역사 인식이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조운제의 근간이 되었던 12조창의 하나인 영풍창(永豊倉)이 바로 이 운하 유적의 북측, 가로림만 연안에 있다. 영풍창의 추정지는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농사짓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지금은 건물의 초석조차 모두 들어내 버리고 말았다. 2009년에 충남발전연구원 연구팀이 이 운하 유적이 문화·관광적 활용 가치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조사 연구 결과를 공표한 바 있다. 그러나 문화·관광적 활용 가치를 논하기 이전에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확보하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따라서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논의를 먼저 앞세우는 것은 일의 순서를 근본적으로 어긋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서산 운하 유적의 보호를 위한 문화재 지정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몇 백 년 전, ‘서해의 물길을 통하게 하라’는 것이 대 과업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이 유적에 대한 사적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하고 보호하는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당면한 우리의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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