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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효자. 계복(戒福)은 아버지 순평(順平)이 죽자 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셨다. 상을 치르는 3년 동안 소금과 간장을 먹지 않아 몸이 나뭇가지처럼 야위니 보는 사람마다 감복하였다. 또한 부모의 심정으로 동생을 보살피고, 재산을 나눌 때는 척박한 토지는 자기가 갖고 기름진 논밭은 어머니와 동생에게 주었다. 집에서 쓰는 가재도구와 곡식도 사사로이 차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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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담양. 자는 우경(虞卿), 호는 경재(敬齋). 1729년 정리된 담양 국씨 족보에는 성유(聖喩)로 적혀 있고, 1974년 족보에는 현남(賢男)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에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국여명(鞠汝明)으로, 호는 정숙(靖肅)이다. 어머니는 문화 유씨로 유창수(柳昌壽)의 딸이다. 첫 번째 부인은 서령 유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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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에서 활동한 효자. 본관은 안동. 할아버지는 충무공 김시민(金時敏)의 5대손으로 인조 때 문장가였던 안풍군(安豊君) 김득신(金得臣)이다. 부인은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의 전주 이씨로 이동백(李東白)의 딸이다. 김가근(金可近)[1658~1740]은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죽어 할아버지와 살았는데, 할아버지는 김가근이 어려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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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김해.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이다. 김옥현(金玉鉉)[1781~1800]은 1797년(정조 21) 5월 아버지가 살인 혐의로 붙잡혀 서산 감옥에 투옥되자 16세의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따라가서 곁을 지켰다. 김옥현이 하도 간절하게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니 옥리(獄吏)도 그의 효심에 감동하였다. 주변에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관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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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광산. 호는 석경(石耕). 광산 김씨 서산 입향조인 김위재(金偉材)의 후손이다. 김용철(金容哲)은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온후하고 성실하여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홀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여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하고, 공무로 문안을 거를 때는 뜰에 서서 바지를 걷고 종아리 맞기를 기다렸다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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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 자는 은담(殷膽), 호는 의암(毅庵)이다. 김학방(金鶴芳)[1764~1822]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일찍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효성 또한 지극하여 아버지가 병들어 눕자 밤낮으로 시중 들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병세를 알기 위해 변을 맛보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에는 여막을 지어 6년 간 시묘살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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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송량환(宋亮煥)[1841~1871]의 본관은 여산이다. 성품이 올곧고 효심이 깊어 아픈 어머니를 정성껏 간병하였다. 어머니가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흘려 넣기도 하였다. 장례 후에는 3년 동안 정성으로 시묘살이를 하였다. 1867년(고종 4) 암행어사로부터 포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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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서산 출신의 효자. 신대남(申大男)은 음암면 점촌[현 서산시 음암면 율목리]에서 도공(陶工)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삼형제가 물가에서 소라 한 개를 주워 똑같이 셋으로 나누며 우애를 다짐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신대남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자기 굽는 일을 하였다. 돈이 생기면 좋은 음식을 마련하여 어머니를 정성으로 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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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순흥. 고려 후기 유학자인 안향(安珦)의 14세손이다. 서산의 순흥 안씨는 병조판서 안국인(安國仁)이 입향한 이후 수백 년 간 서산시 팔봉면 덕송리와 양길리 일대에 모여 살았다. 순흥 안씨는 서산의 토성으로 여러 기록에 나오는데, 조선 초기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안만흥(安萬興)은 서산시 팔봉면 덕송리에서 태어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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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효자. 안천년(安千年)은 지극정성으로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솥을 여러 개 걸어 놓고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골라 드시게 하였다. 넉넉한 양을 준비하여 함께 먹고자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나누었다. 안천년은 또한 아버지를 위해 후처를 구해 드리고자 노력하였는데, 하루는 여자 거지가 동냥자루를 들고 찾아오자 대문 밖으로 나가 큰절로 맞이하였다.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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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서령[서산].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유백순(柳伯淳)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강진현감을 지낸 유억수(柳億壽)이다. 서령 유씨는 고려 시대 이래로 서산에 자리 잡은 토착 성씨이다. 유흡(柳洽)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 유억수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먹게 하였다. 또 종기가 나서 침과 약으로 치료해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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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열녀. 이검손(李儉孫) 처 덕비(德妃)는 어려서부터 북소리와 피리 소리가 들려도 잔칫집에 가지 않았을 정도로 정숙하였다. 이검손과 혼인하여 1남 2녀를 낳고, 살다가 스물다섯에 남편을 잃었다. 삼년상을 치르는 사이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그만할 것을 권했으나 기어이 기한을 지켰다. 사람들이 위로할 때마다 덕비는 눈물을 흘리며 “남편을 잃은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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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열녀. 아버지는 이관순(李寬順)이고, 남편은 청주 한씨 한병두(韓秉斗)이다. 이내희(李來嬉)는 서산시 운산면 와우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품성이 바르고 효심이 깊었다. 19세 때 어머니가 병들자 하늘에 기도하며 정성껏 간병하였고, 병세가 위독해졌을 때는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여 회생시켰다. 이내희는 원북면 장대리[현 태안군 원북면 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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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 변성군(邊城君) 이계연(李繼連)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만원(李晩遠)이다. 이상여(李商礖)[1774~1854]는 서산시 운산면 고산리 곰실마을에서 태어났다. 평소에 쌀뜨물로 미음을 끓여 부모가 잡숫게 하고, 가볍고 따뜻한 옷을 지어 드렸다. 어느 날 밤 삼경쯤 별채에 불이 났다. 이에 이상여는 평소 우레 소리를 무서워하는 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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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효자. 이수(李秀)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집이 가난하였지만 성품이 강직하여 성실하게, 도리를 지키며 살았다. 문과에 급제하여 30여 년 간 옥천군수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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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 부인은 복씨(卜氏), 아들은 이병제(李秉濟), 며느리는 강씨(姜氏)인데 모두 효자, 효부이다. 이영식(李永植)은 1824년(순중 24)에 어머니가 담병(痰病)으로 고생 중 생선을 먹고 싶어하나 가세가 빈곤하고 때마침 엄동설한으로 봉양할 길이 없어 생각다 못해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아 노모에게 대접하였는데 병이 나았다.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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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무신. 본관은 전주.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변성군(邊城君) 이계연(李繼連)이다. 어머니는 서산 정씨로 광주목사 송효명(宋孝命)의 손녀이자 참봉 송유징(宋有徵)의 딸이다. 이이수(李頥壽)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판서 권극지(權克智)에게 시집보냈다. 외손녀의 남편은 좌의정에 오른 월사(月沙)이정구(李廷龜)이다. 이정구의 가문은 3대가 대제학을 지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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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열녀. 아버지는 방동(方同)이고, 남편은 이희석(李希石)이다. 아들은 이무안(李武安)이다. 막개(寞介)는 이웃 마을에 사는 이희석과 혼인하였다. 이희석은 활을 잘 쏘아 사수(射手)로 뽑혔는데 어느 날 호랑이 사냥을 하다가 다쳐서 죽었다. 막개는 가난한 살림에도 지극정성으로 남편의 삼년상을 치렀다. 제사도 정성껏 지냈다. 바른 몸가짐으로 수절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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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평택. 자는 선화(善化), 호는 효당(孝堂). 서산시 지곡면 화천리의 입향조인 임윤(林潤)의 7세손이다. 임영주(林榮周)[1828~1865]는 천성이 후덕하고 효심이 깊어 어버이를 성심성의껏 섬겼다.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자 세 차례나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흘려 넣었고, 수염을 태워서 약과 함께 먹게 하였다. 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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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평강. 1670년경 서산시 운산면 고산리 곰실마을로 입향한 채근후(蔡謹後)의 5세손이다. 부인은 한산 이씨이다. 채홍우(蔡弘宇)[1765~1836]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8세 때 이미 효동으로 이름을 알렸다. 어른이 되어서는 부인 한산 이씨와 함께 정성껏 부모를 봉양하여 칭송을 받았다. 병든 아버지가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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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이다. 최달제(崔達悌)[1669~1731]는 서산의 지곡면 독주동(犢走洞)[현 서산시 지곡면 장현리 애현마을 동남쪽]에 살았다. 부모가 희귀한 병에 걸리자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약을 구해다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에 제단을 쌓아 하늘에 정성스럽게 기도를 올리니 하루는 꿈속에 노인이 나타나 약이 있는 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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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완산. 아버지는 최효민(崔孝敏)으로 세종 때 효행으로 유명한 완산 최씨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의 11세손이다. 서산의 완산 최씨 집안은 5세6효(五世六孝)로 널리 알려졌는데, 최효민을 비롯하여 그의 둘째 아들 최만징(崔萬澄), 셋째 아들 최운두(崔雲斗), 최만징의 아들 최위성(崔渭星), 손자 최종혜(崔宗惠), 후손 최흥철(崔興鐵)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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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 통일 신라 말의 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이다. 최일진(崔日鎭)[1727~1781]은 효심이 깊어 정성과 예로써 부모를 섬겼다. 아버지가 병들자 6년 동안 백방으로 치료법을 수소문하였다. 부모의 병세가 위중해졌을 때는 그 상태를 알기 위해 대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시켰다. 부모가 죽어 장사를 지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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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열녀. 본관은 나주. 아버지는 정명학(丁明學)이다. 남편은 최호문(崔鎬文)이고 시아주버니[남편의 형]는 효자 최호주(崔鎬周)이다. 최호문 처 나주 정씨(羅州丁氏)는 서산 지곡의 최호문과 혼인하여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최호문이 담질(痰疾)에 걸려 여러 달 고생하였는데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고 정성으로 약을 써서 완치시켰다. 이듬해 병이 재발하자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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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및 개항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 자는 귀혁(貴赫), 호는 옥천(玉泉). 경주 최씨 서산 입향조인 최사(崔泗)의 후손이다. 최사는 경기도 양주에 살다가 서산시 지곡면 산성리로 옮겨 갔다. 이때 고려 말의 충신 최청(崔淸)[1344~1414]의 영정을 가져가 부성사(富城祠)에 모셨다고 한다. 정묘호란 때 죽은 최몽량(崔夢亮)의 정려도 이때 옮겨 갔을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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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에 명정의 현판이 보관되어 있는 개항기의 열녀. 본관은 창원. 아버지는 황민수(黃敏洙)이고, 남편은 홍종학(洪鍾鶴)이다. 홍종학 처 창원 황씨는 홍성군에서 황민수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당진군 석문면 삼봉리에 사는 홍종학과 혼인하였다. 2년 만에 남편이 죽자 삼년상을 치른 후 독약을 먹고 자진하였다. 충청남도 당진군 정미면 덕마리에 묘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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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효자. 황필대(黃必大)는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자 치료를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산 사람의 피를 마시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는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흘려 넣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7일 후에 죽었다. 황필대는 통곡하면서 10일 동안 물과 장을 입에 대지 않았다. 또 직접 흙을 져 날라 봉분을 만들고, 3년 동안 여막에 살면서 조석으로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