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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에 있었던 비정규 교육 기관. 간이 학교는 일제 강점기 학교에 취학하지 못한 한국인 아이들에게 초등 교과 과정을 2년 동안에 마치도록 한, 보통학교 부설의 속성 초등학교였다. 수업은 대체로 일본어 교육을 목적으로 하였다. 일제는 1920년대 문화 정치를 실시하면서 1개 면에 1개 초등학교를 설립한다는 목표를 앞세웠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930년대 들어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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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역사. 1876년(고종 13)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강화도 조약 이후 서산 일대에도 예외 없이 개화의 물결이 들이닥쳤다. 당시 국가 권력의 해체 과정에서 관료들의 수탈과 약탈이 횡행했는가 하면, 대외 무역의 확대에 힘입어 만석꾼으로 성장한 부호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였다. 이른바 시대 변화에 편승하여 경제력과 권력을 거머쥔 새로운 주도 세력이 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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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역사. 서산 지역의 근현대사는 개항기,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의 시기로 나누어서 살펴 볼 수 있다. 1876년 개항 이후 궁벽했던 서산에도 개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되었다. 국가 권력의 해체 과정에서 관료들의 수탈과 약탈이 빈번했고, 대외 무역의 확대에 힘입어 만석꾼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였다. 인근 태안군 환동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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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관룡(金寬龍)[1900~1975]은 1919년 당시 해미면에 있던 해미공립보통학교의 졸업반 학생으로 평소에 일제 식민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19년 3월 24일 해미공립보통학교 졸업식 직전에 면사무소 서기인 이계성(李啓聖)으로부터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를 받았다. 김관룡은 졸업생을 위한 고별회에 참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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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사회사업가. 김동윤(金東潤)[1896~?]은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면 대로리에서 태어났다. 젊어서부터 사업을 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농어촌의 환경과 경제 문제에 관심이 많아 농어민과 관련된 일이라면 기꺼이 발 벗고 나섰다. 1934년 삼남 지방이 수해를 입자 복구 의연금을 보냈다. 1964년에는 자금을 희사하여 충청남도 서산시 읍내동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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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에서 활동한 교육자. 본관은 안동.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후손이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였던 척화파 대신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형이다. 그는 청군이 쳐들어올 때 왕족과 종묘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김병년(金炳䄵)[185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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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서산 출신의 의병. 김병수(金炳洙)는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원평리 출신으로 안흥첨사(安興僉使)를 지내다 고향인 서산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1905년 11월 일본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에 거주하는 이남규(李南珪)를 찾아갔다. 이남규는 일찍이 유학(儒學)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로 갑오경장의 부당성과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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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산 출신의 학자이자 교육자. 본관은 경주. 자는 경필, 호는 소암(溯巖).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1889년(고종 26)에 효행으로 정려를 받은 김학방(金鶴芳)[1746~1822]이다. 김상억(金商億)[1862~1938]은 서산의 오랜 세거 성씨인 경주 김씨[일명 한다리 김씨]의 후손으로, 서산군 대산면 광암동[현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 광암마을]에서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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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 자는 명옥(明玉), 호는 한월당(寒月堂). 아버지는 김덕재(金德載)이고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이승원(李昇遠)의 딸이다. 아들은 김홍제이다. 김상정(金商玎)[1875~1954]은 1918년 고종 황제의 승하 소식을 듣고 손가락을 끊어 ‘대명의리(大明義理)’라는 혈서를 써서 깃발을 만들어 달았다.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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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서산 출신의 노비. 김업돌(金業乭)은 지금의 서산시 인지면 야당리에 거주하던 유양렬(柳瀁烈)의 노비로, 주인 섬기기를 자식이 부모를 섬기듯이 하였다. 1927년 발간된 『서산군지』는 김업돌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김업돌은 1858년(철종 9) 생으로, 나이는 69세[1925년]이다. 유양렬의 집에서 55년 동안 살면서 평소 조금도 게으름 없이 정성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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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교육자이자 시인. 본관은 경주.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김영만(金榮晩)[1933~2009]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응평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해미초등학교, 서산농림중·고등학교, 공주사범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였다. 1960년대 『황인부락(黃人部落)』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77년 『현대시학』에 전봉건(全鳳健) 시인의 추천을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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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시인이자 교육자.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봉은(鳳隱)이다. 김용돈(金容敦)[1898~1984]은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독곶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7세 때부터 한문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주경야독으로 학문을 연마하였다. 성장한 후에는 서당을 짓고 훈장을 지내면서 한시 수백 편을 비롯한 여러 장르에 걸친 문장을 지었다. 이때 시 작문을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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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0월 2일 충청남도 서산에서 인천으로 향하던 정기 여객선인 녹도환(鹿島丸)이 침몰된 사건. 충청남도 서산 지역은 철도나 1등 국도가 지나지 않았으므로 육지 교통은 불편하였으나 포구가 발달하여 근대화 이전부터 인천 등지와의 교통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1920년대 중반 서산 지역에서 가장 번성했던 포구는 팔봉면 호리의 구도포, 성연면 명천리의 명천포, 서산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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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일제와 식민지 지주들의 억압과 수탈에 대해 충청남도 서산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농민 저항 운동. 1930년대 초반 공황의 여파로 농민들의 경제생활이 열악해지자 전국적으로 대중 투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예를 들면 소작 쟁의와 노동 쟁의, 부당 수세 반대 운동, 국유지 부당 불하 반대 투쟁, 호세 연납 및 채권 문서 소작 투쟁, 산림 조합 반대 투쟁, 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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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군 대호지면 천의장터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운동. 일제 강점기 3·1 만세 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운동 가운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가장 격렬했던 시위는 1919년 4월 4일 정미면 천의리 천의장터에서 발생하였다. 당시의 천의 장날 시위는 치밀한 사전 준비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남상락(南相洛)은 고종의 인산(因山) 날 참례를 위해 상경하였다가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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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들로 국가보훈처에서 공식 인정한 인물들. 국가보훈처가 운영하는 공훈전자사료관에 탑재되어 있는 포상자 공적 조서 중 서산 출신은 147명[1명은 당진 출신자로 서산 지역에서 활동, 현 당진군 대호지면도 당시 서산군 소속이므로 합산함]으로 확인된다. 훈격별로 보면 애국장 5명, 애족장 49명, 건국포장 4명, 나머지는 대통령 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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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에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일어난 반봉건·반외세 농민 봉기. 서산 지역은 일찍부터 동학이 왕성하던 곳으로, 1894년 북접 농민군이 내포 지역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킬 때, 예산과 더불어 예포 농민군의 중심 근거지였다. 예포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싸운 홍주성 전투는 대단히 규모가 큰 전투였으며, 서산 지역에서는 해미성 전투와 매현 전투 등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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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석림동 망운대(望雲臺) 정상에 세운 일제 강점기 때 비석. 정신보(鄭臣保)[?~1261]는 송나라 절강 사람으로 형부원외랑을 역임하였으며, 몽고를 피해 서해를 건너 간월도에 상륙하였다. 정신보는 이후 고창현[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람 오영로의 딸과 혼인하여 정인경(鄭仁卿)[1241~1305]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서산 정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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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면 행정 자문 기구. 1917년 6월 총독부 제령[제1호]에 따라 조선면제(朝鮮面制)가 실시되면서 전국의 모든 면에 일종의 ‘법인격’[독자적인 사업 능력과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러한 제도적 배경 아래 1920년 지방 제도 개혁 과정에서 면협의회가 설립되었다. 3·1 운동 직후인 1920년 총독부는 조선의 유력자 집단을 지배 체제 내로 포섭하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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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조직된 지방 개량 단체. 1926년 1월 해미면, 고북면, 운산면 세 지역의 유지(有志)들이 서로 상의하여 해미보통학교[현 해미초등학교]에 미성회(美成會)를 설립하였다. 세 지역 내에 ‘품행단정지학우급유지자(品行端正之學友及有志者)’를 회원으로 조직하여 해미보통학교를 후원하고, 도덕심 배양, 문예 계발, 풍기 위생 개선, 산업 증진, 생활 개선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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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언론인이자 문인. 호는 우보(牛步) 또는 부춘산인(富春山人). 아버지는 민삼현이다. 민태원(閔泰瑗)의 할아버지가 산청현감을 지낸 인물이라 사람들이 그의 집을 민산청 댁이라 불렀다고 한다. 민태원[1894~1934]은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신장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909년에 상경하여 수하동 공립 보통학교와 경기고등보통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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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교육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순좌(蕣佐), 호는 경암(絅庵)이다. 민태직(閔泰稷)[1868~1935]은 충청남도 서산시 오남동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유진하(兪鎭河)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1885년에 부친상을 당하자 몹시 슬퍼하며 시묘살이를 하였고, 시묘살이 중에도 경서를 탐독하고 예를 강론하였다. 민태직은 근대화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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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 농민 전쟁 때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최후 전투지. 서산 지역은 일찍부터 동학이 왕성하던 곳이었다. 특히 서산 지역의 농민군은 1894년 북접 농민군이 내포 지역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킬 때, 예포 농민군의 주력군 역할을 수행하였다. 예포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싸운 홍주성 전투는 전주성 전투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현재 서산시 소탐산에 위치한 매현(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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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부터 약 2개월 동안 충청남도 서산시를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운동. 3·1 운동 당시 서산에서는 12개 면에서 독립 만세 시위운동이 발생하였다. 특히 4월 4일 서산 지역 천도교인들이 주도한 대호지면 만세 사건은 상당수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미국 대통령 윌슨이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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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충청남도 서산 지역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청년 운동 단체.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최초로 조직된 청년회는 1920년 서산 지역 청년들이 조직한 서산청년회였다. 서산청년회를 뒤이어 서산 지역의 청년 활동을 이끈 조직이 바로 서령청년회였다. 창립 당시 유명무실하기는 했지만 서산청년회가 온존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서령청년회’라 이름하였다. 서산청년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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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조직된 고아 구제 기관. 서산고아구제회는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고아를 구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18년 1월 서산군수 지희열과 지역 내 유지들에 의해 서산고아구제회가 결성되었다. 지역 유지들이 모금한 의연금, 경성 살다렐 재단 법인의 기부금, 지방 보조비, 기타 유지들의 기부금 등으로 운영되었다. 고아구제회는 1920년대 초반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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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0월 1일 동학 교도들이 충청남도 서산의 관아를 습격한 사건. 서산·태안 지역에서 조직적인 농민 봉기가 시작된 것은 1894년 음력 10월 1일[양력 10월 29일]이었다.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그해 9월 14일 태안군수 신백희(申百熙)와 종친부에서 파견된 별유사 김경제(金慶濟)가 동학 두령 30여 명을 투옥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 예포대도소(禮包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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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있었던 교육 종사자 단체. 서산교육회는 충청남도 서산 지역 교육의 개선과 진보를 위해 설립되었다. 학교비나 학교 조합과는 별도로 존재했던 일종의 교육 종사자 단체로서 정식 명칭은 ‘조선교육회 충청남도교육지회 서산분회’였다. 서산교육회는 1923년 6월에 설립되었으며 창립 당시 회장 1명, 부회장 2명, 평의원 약간 명이 두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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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있었던 금융 조합. 1907년경부터 군을 단위로 지방 금융 조합이 설립되어 화폐 정리 사업, 납세 선전 활동, 농사 지도 장려 사업 등의 정책 사업을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농공은행의 말단 조직으로서 농업 자금의 대부, 농산물의 위탁 판매, 종자·비료·농구 등의 분배 및 대여 등의 업무도 수행하였다. 이는 서산금융조합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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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조직된 청년 운동 단체. 서산노동청년회는 지역 내의 노동자, 소작인, 머슴 청년들의 권익을 위해 조직되었다. 1928년 1월 노동자, 소작인, 머슴 청년들을 중심으로 서산노동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창립 당시 위원장은 박연(朴演), 부위원장은 조석구(趙錫九), 서무부는 한병욱·노영호(盧永鎬), 사업선전부는 이흥식·임국빈·최용안, 재무부는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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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있었던 삼림 조합. 충청남도 서산 지역은 개항기부터 불을 때서 소금을 굽는 자염업(煮鹽業)이 발전하였고 일제 강점기에 들어 삼림은 심하게 황폐해졌다. 당시 서산 지역에 삼림조합 활동이 활발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 서산군청과 서산군 대지주들은 삼림조합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는데, 그 이유는 서산 지주들의 주요 사업인 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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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조직된 소비조합. 1920년대 서산 읍내장의 상권은 일본인과 중국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신문들은 서산 지역의 상업이 부진하게 된 원인으로 “첫째 자본 문제도 있거니와 대부분은 상업 경영 방침의 불충실, 불친절한 까닭, 둘째 일반 고객의 심리가 외인(外人)의 상회에서 매매(賣買)를 선호하는 까닭” 등을 손꼽았다. 1926년 서산 지역의 1년 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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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조직된 청년 단체.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은 육로 교통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타 지역보다 신문화 유입이 더딘 지역이었다. 서산청년회는 3·1 운동 직후 시작된 문화 정치의 일환으로 서산 지역 신문화 운동 전개를 위해 조직되었다. 1920년 창립 당시 서산청년회의 조직 구성이나 활동 상황은 알 수 없다. 1922년 7월 서산청년회 회장 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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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조직된 형평사의 지회. 조선 시대에는 도살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을 흔히 ‘백정’이라 부르며 천대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완전히 철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자, 백정 신분이었던 사람들은 1923년 4월 신분 차별 타파, 공평 사회 건설,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 균등 및 지위 향상, 사회 참여 진작, 동지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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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있었던 조선농회의 지부. 일제 강점기 서산 지역의 대지주들은 조선 총독부의 지도 감독 아래 농업을 개발하고, 농민을 수탈하고, 농촌을 통제하는 삼중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1926년에 체계화된 이른바 계통 농회였다. 서산군 농회 역시 이러한 계통 농회의 하나이다. 주요 임원은 대부분 서산 지역의 재지 대지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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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있었던 교육 관련 자문 기관. 학교평의회는 부윤과 군수의 학교비(學校費) 자문을 위해 설립되었다. 1920년 제령 제14호 학교비령(學校費令) 제9조에 의거하여 설치되었다. 평의원은 면협의회가 선출하고 당연직 의장인 군수가 임명하였다. 평의원의 자격은 ‘제국신민으로서, 독립적으로 생계를 영위하는 연령 25세 이상의 군내 1년 이상 거주자로서,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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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서산 출신의 향리. 서세린(徐世獜)은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서산관아의 예방 소속 서리[구실아치]였다. 1894년(고종 31) 서산·태안까지 동학 운동이 번져 농민군이 관아를 습격하였다. 농민군은 군수 박정기(朴錠基)와 구실아치의 우두머리[首吏]인 송병훈(宋秉勳)을 살해하고 관아 건물을 불태워 버렸다. 이런 혼란 속에서 서세린은 객사에 봉안되어 있던 전패[임금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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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읍내동에 있는 성암서원의 중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 성암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는데, 유허지에 석회로 광을 만들어 위판을 도자기에 넣은 후 분묘처럼 매안하였다. 이후 1897년 성암서원 터에 양가의 후손들이 유허비를 세웠다. 성암서원은 일제 강점기인 1924년 7월에 중건되었는데, 성암서원 중건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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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소작 농민이 지주·소작 관계, 소작 조건의 개선을 위해 벌인 농민 운동. 일제는 식민지 지주제를 확립한 후 조선의 농업 개발 및 농민 수탈, 농촌 통제를 일삼았다. 이런 과정에서 조선의 농촌 사회는 자작 농민의 소작인화, 소작료의 고율화, 소작권의 불안정화, 마름의 중간 수탈 현상 등이 심화되었다. 사정이 이러하자 농촌 사회 내부에는 소작 쟁의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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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서산 출신의 향리. 송병훈(宋秉勳)[?~1894]은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서산관아의 수리(首吏)[이방 우두머리]였다. 1894년(고종 31) 10월 1일 서산·태안 지역에서는 조직적인 농민 봉기가 일어났으며, 서산에서는 관아가 습격 받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농민들이 서산관아를 공격하자 송병훈은 군수 박정기(朴錠基)를 도와 관아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그러던 중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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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조직된 신간회의 지회. ‘민족 독립 쟁취’, ‘기회주의 배격’ 등의 강령을 내걸고 창립된 신간회는 일제 강점기 국내에 조직된 민족 운동 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큰 단체였다. 창립 당시 신간회 지부는 전국 141개 지역[회원 수 약 4만 명]에 걸쳐 조직되었으며, 충청남도 지역에는 서산을 포함하여 강경, 공주, 당진, 대전, 부여, 예산, 천안, 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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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가야금 연주자. 본관은 청송. 할아버지는 피리와 퉁소를 잘 불었던 심팔록이고, 아버지는 가야금 산조의 명인 심창래(沈昌來)[?~1895]이다. 작은아버지가 가야금 연주자 겸 판소리 명창인 심정순(沈正淳)[1873~1937]이다. 서산 청송 심씨 가문의 예술인으로는 국악 이론가 심재덕(沈載德)[1899~1967], 소리와 병창에 능했던 심매향(沈梅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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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판소리 명창 겸 가야금 연주자. 본관은 청송. 아버지는 피리와 퉁소에 능했던 심팔록이다. 아들은 판소리 명창 심재덕(沈載德)[1899~1967]이고, 딸은 심매향(沈梅香)[1907~1927]이다. 막내아들은 심화영(沈嬅英)[1913~2009]으로 ‘중고제의 마지막 계승자’로서 2000년 충청남도 무형 문화재 제27호 승무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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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에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회 교육 운동. 일제 강점기에 보통학교라도 다닐 수 있었던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당시에는 대략 20~30% 정도의 아동만이 교육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보통학교는 공립 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학부형들의 부담에 의거해 운영되었다. 사정이 이러하자 조선의 농촌에는 사설 강습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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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있었던 어업 조합. 『충청남도도세일반(忠淸南道道勢一斑)』 민적(民籍) 자료를 참고하면 서산군 바닷가에 인접한 면에 많은 어업 인구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내포라는 별칭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서산군에는 소규모의 포구를 중심으로 연안 어업이 발달하였다. 1908년 서산군의 어업자는 71호에 238명, 태안군은 117호에 375명, 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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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전개된 조선어 신문사 지방 지국의 투쟁. 일제 강점기 『동아일보』 지방판에 소개된 민원 사건으로는 1926년 1월 서산 소방조 문제 관련 민원, 1927년 6월 소작 관계 개선 문제[특히 경성 지주의 이중 운반 강요, 운반비 강요 문제]에 관한 민원, 1931년 1월 서산 지역 유치원에 관한 민원, 1930년대 초반 해미 수리 조합 문제 관련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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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장리에 있는 개항기부터 현대까지 세워진 14기의 비석.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장리에 있는 운산면사무소 왼쪽의 농협 창고 앞에 용장리 비석군이 위치하고 있다. 1. 항일애국지사용곡허후득선생기념비(抗日愛國志士龍谷許後淂先生紀念碑)는 옥개형으로, 2004년에 건립되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183㎝이며, 비신은 높이 137㎝, 너비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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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침공으로 충청남도 서산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6·25 전쟁 초기 미군과 인민군의 전투는 주로 경부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므로 서산군에서는 전투와 관련한 직접적인 피해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서산 사람들이 전쟁의 와중에 목숨을 잃거나 이산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서산 지역에서도 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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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 본관은 칠원. 할아버지는 의금부도사를 지낸 윤정학이고, 아버지는 윤병규(尹炳奎)이다. 어머니는 광산 김씨이다. 부인은 온양 예안 이씨 가문의 이용완이다. 윤곤강(尹崑崗)[1911~1950]은 충청남도 서산시 동문동 777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할아버지 윤정학으로부터 한학을 배우는 등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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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교육자이자 시인. 윤덕구(尹德九)[1929~1989]는 1929년 서산에서 출생하였으며, 서령중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으로 서령고등학교 교감에 이르기까지 교직 생활과 문학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63년에는 시인 이생진(李生珍)과 함께 동인지 『문(門)』을 창간하였다. 1964년에는 송종학(宋鐘學), 김영삼(金永三), 강현서(姜顯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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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이 원적인 근현대 아동문학가. 본관은 파평. 호는 석동(石童). 아버지는 사회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인 윤덕병[1885~1950]이고 어머니는 조덕희다. 부인은 박용실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원적은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율목리다. 윤석중(尹石重)[1911~2003]은 서울 중구 수표동에서 윤덕병과 조덕희의 여덟째 자녀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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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에서 활동한 아동 문학가 윤석중(尹石重)이 지은 창작 동요집. 윤석중은 방정환(方定煥)의 뒤를 이어 잡지 『어린이』의 주간을 맡았고, 1,200여 편의 동시를 지었다. 그중 800여 편이 동요로 작곡될 만큼 아동 문학계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의 출생지는 본래 서울이지만, 1930년대 초부터 1961년까지 서산에 머물렀다. 『윤석중 동요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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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서산 지역에서 활동한 문인. 본관은 무송. 자는 원보(元甫), 호는 우해당(雨偕堂) 또는 인재(仁齋). 아버지는 윤봉헌(尹奉憲)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이다. 무송 윤씨의 주요 세거지는 당시 서산 지역이었던 태안군 소원면 시목리이다. 윤호(尹昊)[1868~1907]는 송근수(宋近洙)와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유중교의 가르침을 사표로 삼아 정자(程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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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에서 활동한 교육자. 본관은 서천(舒川). 호는 소매(小梅). 아버지는 이우규(李禹奎)이다. 이석태(李錫泰)[1884~1967]는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상정리에서 이우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는데, 10세 때 홍주목사가 개최한 경서 강의에 나가 유생들과 함께 실시한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할 정도였다. 1900년에는 국비 장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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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언론인, 종교인, 정치가. 본관은 성주. 아호는 황산(凰山), 도호(道號)는 보암(普菴). 필명은 봉황산인(鳳凰山人). 아버지는 이교칠(李敎七)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다. 유복자로 태어나 작은아버지 이교삼(李敎三)의 양자로 들어갔다. 부인은 심은택의 딸 심인화이다. 이종린(李鍾麟)[1883~1950]은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화천리의 외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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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언론인이자 교육자. 아버지는 한학자인 소매 이석태(李錫泰)이다. 이지풍(李之渢)[1929~2002]은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가사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이석태에게 한학을 배웠다.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지만 탁월한 한학 실력과 재능을 인정받아 1957년 『중도일보』에 특채로 입사하였다. 평기자로 출발하여 충청남도청 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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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4월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 보현동에서 발생한 동학 농민군의 재지 양반 습격 사건. 서산 지역에 동학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이 발발하기 몇 년 전쯤이었다고 한다. 서산·태안 지역을 포함하여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에 동학이 급속하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1907년 천도교의 제4대 교주로서 활약한 덕산 출신의 박인호(朴寅浩)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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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산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연안. 자는 중길(重吉), 호는 직암(直菴). 이정구(李廷龜)[1564~1635]의 후손이다. 이철승(李喆承)[1879~1951]은 유진하(兪鎭河)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갑오경장 이후 들어온 신학문은 선왕의 전장문물(典章文物)을 없애고 민중을 현혹하여 인간의 심성과 윤리를 망치며 천리를 거역한다고 비판하였다. 성리학적 질서를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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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연안. 자는 윤숙(允淑), 호는 부재(復齋) 또는 정우(靜寓). 문충공 월사 이정구(李廷龜)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이인승(李仁承)이고 어머니는 광산 김씨이다. 이철영(李喆榮)[1884~1945]은 1910년 8월 서산 읍내에 있는 경찰서 게시판에 한일합방에 대한 방문이 붙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포고문을 찢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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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언론인. 이한용(李漢鎔)[1918~1985]은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법률 공부를 하여 변호사 예비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언론인이 되었다. 『서울신문』 기자로 이직한 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였다. 이후 『민주일보』 기자, 정치부장·사회부장 등을 지냈다. 1954년에는 『평화신문』의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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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조직된 직업소개소이자 생활 법률 상담소.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인사상담소는 1922년 6월 충청남도 경찰부의 지시에 따라 일괄 설립되었다. 당시 인사상담소는 서산·해미·태안 경찰관 주재소에 각각 설치되었는데, 상담소의 관리 주체는 각 면 주재소의 경찰들이었다. 충청남도 경찰부는 빈곤자 또는 실직자, 기타 특수 사정이 있는 자들의 상담을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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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역사. 조선왕조의 지방지배체제는 ‘갑오·을미개혁’ 이후 커다란 변화를 거쳤다. 『서산군지(瑞山郡誌)』에 따르면, 1895년 부(府)·군(郡)·현(縣)제를 일체 폐지하여 군으로서 명칭을 통일하고 각 군을 군세(郡勢)에 따라 4등급으로 분류하였다. 그런 뒤 군에는 군수를, 면에는 면장을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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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에서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정기적으로 열렸던 시장. 개항기 때 서산 지역의 포구 상업은 어느 정도 발달하였으나, 지방 장시는 대단히 미약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야 상설 점포가 늘어나는 등 서서히 상설 시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으나, 1930년대 후반까지 기본적으로 재래의 경제 구조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상업 활동은 여전히 정기 시장[오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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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조직된 사설 금고. 총독부가 저축조합의 설립을 장려했던 것은 ‘근검저축’, ‘식산(殖産)’ 차원에서였다. 서산의 저축조합은 1919년경 군수 지희열이 군내의 모든 면민들로부터 매년 하모추조(夏牟秋租)를 몇 승(升)씩 거두어 조직한 조합 형태의 조직이었다. 조합장은 해당 면장이나 해당 지역의 중심인, 즉 면 단위 유지들이었다. 서산 지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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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이루어진 소금 생산업. 조선 시대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는 바닷물을 가마솥에 끓여서 소금을 만드는 화염(火鹽)이나 자염(煮鹽) 생산이 활발하였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천일염 생산 방식이 보급되면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염전을 활용한 천일염 생산이 확산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서산 지역에서도 갯벌에 염전을 만들어 바닷물을 졸인 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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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0일 충청남도 서산군에서 실시된 선거. 1945년 12월 공표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신탁 통치 반대 운동 등으로 말미암아 무산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UN총회로 넘겨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안’을 가결시켰으나, 소련의 반대로 이 또한 무산되었다. 그러자 미국은 UN 소총회를 통해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안[단독 정부 수립안]’을 가결시킨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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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교육자이자 시조시인. 조재억(趙載億)[1921~2005]은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에서 출생하였다. 단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건국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서산농림중·고등학교의 국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같이 근무한 한담(韓湛)과 함께 학생들의 동인지인 『수라장(修羅場)』의 발간을 지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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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산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 본관은 평양, 자는 중오(中五), 호는 난사(蘭史). 고려 충선왕 때의 공신인 조인규(趙仁規)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길주목사를 지낸 조존항(趙存恒)이고 어머니는 영산 신씨이다. 조희천(趙羲天)[1845~1924]은 어려서부터 명민하였고, 유려한 문장과 단정한 필법을 구사하였다. 아버지 조존항과 스승 조존화(趙存華)에게서 학문을 배워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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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에 있는 공주지방법원 서산지청의 이전 반대 운동. 1932년 10월 공주에 있던 충청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되면서, 도내 지역 지방 관공서의 이전 혹은 재배치 문제가 지역 사회의 민감한 사안으로 떠올랐다. 공주지방법원 서산지청의 폐쇄 문제를 둘러싼 민원 사건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공주지방법원 서산지청이 폐쇄된다는 정보가 알려지자 193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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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충청남도 도령(道令)에 따라 충청남도 서산에서 조직된 단체. 1916년 8월 충청남도 도장관 오하라 신조[小原新三]가 각 군에 훈령으로 미풍양속 보호 및 유지, 지방 개량을 목적으로 옛날부터 내려온 향약례를 모방하여 마을 단위로 진흥회를 조직하는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1926년 10월 24개 면의 진흥회 회장들이 서산군청의 농회장(農會場)에서 모여 서산군연합진흥회를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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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있었던 천도교 사무 행정 기관. 천도교 종리원은 제3대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의 사후 중앙과 지방에 있었던 천도교의 사무 행정 기관이었다. 충청남도 서산 지역은 내포 지역 농민 전쟁의 진원지라 이야기 될 만큼 동학의 교세가 강력한 지역이었으며, 이런 교세는 천도교 창립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1910년대 말부터 서산 천도교 종리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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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사회 운동. 일제 강점기 때 서산은 교통이 불편하여 신문화 유입이 더딘 지역이었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 보통학교 교육이 보급되고, 동경이나 경성 등지의 외지 유학생들까지 대거 귀향하면서 청년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서산 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농촌 개량이나 농민 계몽을 목표로 한 실력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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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에 있는 개항기 최광순(崔光淳)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최광순은 오위장(五衛將), 횡성현감(橫城縣監) 등을 역임하였으며, 1883년(고종 20)에 해미현감(海美縣監)으로 부임하여 만인산(萬人傘)을 받았다. 만인산이란 고을 백성들이 선정을 베푼 수령에게 그 덕을 기리기 위하여 바치던 물건으로, 비단으로 만들었고, 모양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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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서산·태안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 본관은 경주. 호는 노백(老柏). 경주 최씨는 서산·태안 지역의 전통 있는 성씨 중 하나이다. 최명희(崔命喜)의 일가는 태안군 근흥면 안기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최명희[1851~1917]는 개항기 및 일제 강점기 때 활동한 유학자로 승지(承旨)를 지냈다. 1877년 이이(李珥), 이황(李滉)의 사상을 잇는 기호학파 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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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출신의 체육인이자 교육자. 최범수(崔範洙)는 우수한 체육 활동으로 서산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학교 체육 및 사회 체육의 진흥으로 시민의 체력 향상과 지역의 체육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나아가 체육 활동을 통한 시민 화합과 지역 발전에 기여하였다. 최범수[1925~1983]는 서산시 고북면 기포리 238번지에서 태어났다. 고북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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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한기동(韓基東)[1898~1997]은 본관은 청주, 평양 출신이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경기도 장단군 진남면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고, 같은 해 3월 26일 백태산(白泰山)·이성구(李成九)·이창영(李昶永) 등 100여 명의 인사와 함께 성화학교(聖化學校)를 출발하여 인근 지역을 돌면서 독립 만세 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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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문인이자 교육자. 한담(韓湛)[1917~1950]은 어린 시절 한학과 신학문을 동시에 수학하였다. 1937년 성균관에서 주최한 전국 한시 대회에 장원을 수상하였으며, 1940년에는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한담은 1940년대 서산농림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하였다. 당시 조재억(趙載億)[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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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지역에 조직된 노동조합. 해미노동조합은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지역 민중들의 계몽과 지역 사회 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1928년 창립 당시 회관 건축, 노동 야학, 의무금 중징, 조합원 소비 절약, 순회강연 등에 관한 사항을 주요 안건으로 상정했던 것으로 보아 해미노동조합은 단순한 노동조합이 아닌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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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1월 충청남도 서산의 해미성에서 벌어진 내포 동학 농민군과 관군의 전투. 1894년 이른바 예포[북접] 농민군이 내포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킬 때, 서산 지역의 동학 교도들은 예포 농민군의 주력군 역할을 수행하였다. 홍주성 전투는 그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동학 농민 전쟁사에 새롭게 기록해야 할 중요한 전투였다. 홍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농민군은 이후 해미성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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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태안군 근처 해상에서 발생하여 서산시 지역까지 영향을 끼친 허베이스피리트호의 기름 유출 사건. 2007년 12월 7일 충청남도 태안군 앞바다에서 삼성중공업 소속 크레인선과 유조선 허베이스피리트호가 충돌하여 1만 2000㎘로 추정되는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하였다. 유출된 원유는 태안군을 넘어 충청도 해안 전역, 심지어 전라남도와 제주도까지 흘러들어가 생태계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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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역사.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서산 지역도 커다란 정치적 변화에 직면하였다. 일제 강점기 ‘유지(有志) 명부’에 올라 있었던 주요 인물들과 ‘요주의·요시찰인 명부’에 올라있던 사람들의 정치적 지위가 갑작스럽게 뒤바뀌기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른바 ‘당국신용(當局信用)’을 가진 지방 유지들은 ‘친일파’나 ‘반민족 행위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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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화곡1리에 있는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세워진 4기의 비석.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화곡1리 마을회관 앞에서 동쪽으로 화곡리 비석군이 세워져 있다. 1. 첨사박후윤묵영세불망비(僉使朴侯允黙永世不忘碑)는 귀접이 양식으로, 1884년(고종 21)에 건립되었다. 전체 높이는 128㎝, 비신은 높이 112㎝, 너비 53㎝, 두께 16㎝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