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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1279
한자 天主敎海美殉敎
영어의미역 Daesan Catholic Church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성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791년연표보기 - 박취득 문초, 석방
종결 시기/일시 1868년 6월연표보기 - 박유갈 순교
발단 시기/일시 1800년 1월 9일연표보기 - 인언민, 이보현 순교
전개 시기/일시 1866년 9월 15일연표보기 - 병인양요 발생
전개 시기/일시 1868년 4월 18일연표보기 - 남연군묘 도굴 사건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68년연표보기 - 생매장 순교
발생|시작 장소 해미 옥사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32-2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서문 밖 순교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359-5 지도보기
종결 장소 여숫골 생매장 터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읍내리 274-10]지도보기
성격 순교 사건

[정의]

개항기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서 발생한 천주교인들의 순교 사건.

[개설]

조선 후기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확산되면서 내포(內浦)[충청남도 서북부 가야산 주변을 통칭하는 지역] 지방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호서좌영(湖西左營)이 자리했던 해미에서는 문헌상 179명의 순교자가 확인되고 있으나, 이름도 남기지 못한 무명 순교자가 더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해미의 순교자는 내포 지역의 민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순교 시기가 병인박해 때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역사적 배경]

양반 지식인들을 통해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전래된 천주교는 1784년 이승훈(李承薰)의 세례 이후로 본격적인 신앙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신앙으로 발전한 천주교가 가장 활발하게 포교된 곳은 충청도 내포 지방이었다. 한편, 성리학적 이념을 통치 기반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는 천주교의 확산을 통치 질서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조정은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는 한편 천주교인들은 외세를 끌어들이는 ‘통외분자(通外分者)’로 낙인찍혔다. 그리하여 천주교 신앙은 수용 초창기부터 배척을 받게 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거세질수록 활발한 포교가 이루어진 내포 지방의 피해가 가장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호서좌영과 토포영(討捕營)을 겸하고 있어서 이 지역 군사와 치안을 담당하던 해미는 내포 지방 천주교 탄압의 전초 기지가 되었다.

[경과]

해미의 천주교 박해는 이미 1791년 면천 출신 박취득[세례명 라우렌시오]이 천주교와 관련하여 형벌을 받았다는 기록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천주교 수용 초창기부터 내포 지방에 천주교가 확산되고 있었으며, 해미 진영이 천주교도 색출과 처벌에 기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결국 1800년에 덕산 주래 출신 인언민[세례명 마르티노]과 덕산 황모실 이보현[세례명 마르티노]이 장살형(杖殺刑)을 받아 해미에서 처음 순교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후 해미 진영을 통해 수없이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수감된 채 옥사하거나 사형에 처해졌으며 감영으로 보내져 처형되기도 하였다. 해미 순교가 절정을 이룬 것은 이른바 병인박해 시기이다. 병인양요가 일어난 1866년(고종 3)과 대원군의 친산(親山)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이 발생한 1868년에 해미 순교자가 급증한 사실은 척사양이(斥邪洋夷)의 기치를 내건 조선 왕조의 의지와 해미 순교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결과]

천주교 측 기록과 관변 기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해미의 순교자는 총 179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박해의 초·중기라고 할 수 있는 1800~1839년에 10명의 순교자 명단이 확인되고 있으며, 박해 후기인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시기에는 무려 122명의 순교 명단이 확인된다. 여기에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문헌상 순교한 것이 분명한 47명을 포함하면 병인박해 때의 해미 순교자는 169명이 된다. 하지만 구전에 의하면 파악된 순교자 외에 훨씬 더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구전을 통해 전해지는 해미의 순교는 오랫동안 무명자들의 순교로 특징지어져 왔다.

[의의와 평가]

군사와 치안을 동시에 담당하고 있던 해미 진영은 조선 왕조의 방침에 따라 내포 지방 천주교 탄압의 전초 기지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발생한 천주교 해미 순교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조선의 천주교 수용 초창기부터 박해가 이루어진 점. 둘째, 무명 순교자가 많다는 점, 셋째, 병인박해 때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찍부터 천주교가 수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인을 포함한 비교적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중심을 이루었던 내포 천주교회의 성격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해미 순교가 당시 조선의 정세와 왕조의 정책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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