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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858
한자 金止男
영어음역 Gim Jinam
이칭/별칭 자정(子定),용계(龍溪)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9년연표보기 - 김지남 생
활동 시기/일시 1591년연표보기 - 생원진사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1년연표보기 -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승문원정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3년연표보기 - 예문관검열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황주판관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01년연표보기 - 사간원정언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3년연표보기 - 사헌부집의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21년연표보기 - 경상도관찰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28년연표보기 - 청풍부사 부임
몰년 시기/일시 1631년연표보기 - 김지남 졸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54년연표보기 - 외손 이관하가 유고를 수습하여 『용계유고(龍溪遺稿)』 간행
부임|활동지 황주목 - 황해도 황주군
부임|활동지 경상도
부임|활동지 청풍부 - 충청북도 제천시
묘소|단소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광산
대표 관직 경상도관찰사

[정의]

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정(子定), 호는 용계(龍溪). 평양서윤을 지낸 김순성(金順誠)의 현손으로, 생부는 영동현감을 지낸 김표(金彪)이며, 재종숙 김양(金讓)에게 입양되었다.

[활동 사항]

김지남(金止男)[1559~1631]은 1591년(선조 24)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43인으로 합격하고 그 해 별시 문과에 병과 12인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함에 따라 행재소에서 승문원정자가 되고, 1593년에는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서 1597년 황주판관이 되고, 예조좌랑, 경기도사, 평안도사 등을 거쳐 1601년에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602년(선조 35)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손실된 실록을 재편하는 데 간여하였다.

1606년(선조 39) 접위관(接慰官)으로 임명되어 왜의 사신을 접대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이이첨(李爾瞻)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려 했으나 절의로 반대하였다. 1621년(광해군 13)에 경상도관찰사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때 임명된 조신들이 외직에서 모두 파직되었을 때 특별히 유임되었다. 1628년(인조 6) 노령에도 청풍부사로 나갔다가 그 해 겨울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위치하고 있는 단구대(丹丘臺)는 김지남이 경상도관찰사를 마치고 한림이 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 산책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단구대는 효릉참봉을 지낸 김호열(金好說)의 집 뒤에 위치하였는데, 언덕의 절경에 반해 김지남이 ‘단구(丹丘)’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후에 서산 출신의 문신 김적(金積)이 단구에 반해 대(臺)를 쌓아 단구대라 이름 짓고, 호도 단구자(丹邱子)라 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지남의 저서로는 『용계유고(龍溪遺稿)』가 남아 있다. 김지남의 외손 이관하(李觀夏)는 김지남의 유고를 수습하여 1654년(효종 5)에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였다. 1697년(숙종 23)에 외증손인 이선부(李善溥)오도일(吳道一)[1645~1703]의 서문과 정두경(鄭斗卿)[1597~1673]에게 받은 묘갈명, 이선부의 발문을 보태어 목판으로 문집을 발간하였다. 또한 김지남광산 김씨 가계의 기록을 수집하여 『용계보(龍溪譜)』를 간행하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묘소]

김지남은 1631년(인조 9)에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세상을 떠난 후 광주(廣州) 매장리(梅庄里) 고산(孤山)에 장사를 지냈으며,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에 위치하고 있다. 집안이 가난하여 사후에 비석을 세우지 못하자, 출가한 딸이 부친의 행적이 전해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아들 이관하로 하여금 유고를 수집하고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정두경이 찬한 묘갈명에는 김지남의 행적, 생몰년, 장지, 선후 가계, 관직 생활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광해군 재위 시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처하면서 보여준 그의 비판적인 태도와 도덕적 의식을 칭송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631년에 73세로 세상을 떠나니 인조가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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