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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849
한자 金有慶
영어음역 Gim Yugyeong
이칭/별칭 덕유(德裕),용주(龍洲),용곡(龍谷),효정(孝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69년연표보기 - 김유경 생
활동 시기/일시 1693년연표보기 - 사마시에 합격
활동 시기/일시 1710년연표보기 -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14년연표보기 - 함경북도암행어사로 파견
활동 시기/일시 1716년연표보기 - 수찬이 되고 홍문록(弘文錄)에 오름
활동 시기/일시 1717년연표보기 - 정언을 거쳐 사간·교리·대사헌·대사간·동지경연을 지내고 다시 참판·도승지·한성판윤·공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
활동 시기/일시 1719년연표보기 - 의주부윤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20년연표보기 - 황해감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22년연표보기 - 숙천(肅川)으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725년연표보기 - 호조참의가 되고, 도승지·대사헌을 거쳐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726년연표보기 - 이조참판
활동 시기/일시 1727년연표보기 - 제주도 대정(大靜)으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727년연표보기 - 영광으로 이배
활동 시기/일시 1729년연표보기 - 영광에서 해배
활동 시기/일시 1730년연표보기 - 형조참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36년연표보기 - 호조참판·부제학을 거쳐 판윤·평안도관찰사
활동 시기/일시 1744년연표보기 - 대사헌에 승진
활동 시기/일시 1744년연표보기 - 파직
활동 시기/일시 1746년연표보기 - 좌참찬으로 관직에서 물러남
활동 시기/일시 1748년연표보기 - 숭록대부에 특진됨
몰년 시기/일시 1748년연표보기 - 김유경 졸
추모 시기/일시 1754년연표보기 - 효자 정려와 시호를 받음
추모 시기/일시 1764년연표보기 - 김유경 신도비 건립
유배|이배지 숙천(肅川) - 평안남도 서부에 있는 군
유배|이배지 제주도의 대정(大靜)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묘소|단소 김유경 신도비와 묘역 -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연화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관직 좌참찬

[정의]

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유(德裕), 호는 용주(龍洲)·용곡(龍谷). 할아버지는 김자진(金自珍)이고, 아버지는 진사 김두징(金斗徵)[1646~1678]이며, 어머니는 군수를 지낸 파평 윤씨 윤필은(尹弼殷)의 딸이다. 김유경(金有慶)은 서산 대교[한다리] 경주 김씨의 후손이다. 세칭 한다리 김씨라고 불리는 김유경의 가계는 김연(金堧)[1494~?]이 입향조이며 그 후손들에 의해 경주 김씨 서산 대교파가 형성되었다.

김연의 5세손에 이르러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되면서 가문이 성장하였다. 특히 단구자 김적(金積)의 네 아들인 김홍익(金弘翼), 김홍양, 김홍필, 김홍욱(金弘郁)은 요직을 거치며 왕실과 내외 척분을 맺어 국중 명문의 반열에 앉게 되었고, 김홍욱의 증손인 김흥경영조 초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김한구의 딸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1745~1805]로 간택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경주 김씨 가계에서는 200년 동안에 문과 급제자를 32명이나 배출하였다.

[활동 사항]

김유경[1669~1748]은 서울의 송현방제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1693년(숙종 19) 사마시를 거쳐,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정언·수찬·대사헌·대사간·공조판서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로 인해 숙천(肅川)[현 평안남도 서부에 있는 군]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이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집권으로 풀려나 호조참의가 되고, 도승지·대사헌을 거쳐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이 일어났을 때 『숙종실록(肅宗實錄)』의 보수에 반대한다는 소론의 탄핵으로 제주도와 영광 등으로 유배되고, 1729년(영조 5) 소론이 물러나자 석방되었다.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이 노론 사대신의 죄목을 적은 임인옥안(壬寅獄案)을 비판하며 사실(史實)을 새로 쓰라는 상소를 했다가,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는 주장이라 하여 상소문이 불태워졌다. 그 후 노론의 지지로 즉위한 영조 대에 더욱 치열한 당쟁에 휘말리게 된다. 그는 계속 탕평책을 반대하며 노론 계열의 반탕평론(反蕩平論)을 변호하다 파직되기도 하였다.

김유경은 효자로도 유명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서산의 인지면 두곡리에 묘를 쓰고 흰 베로 의관을 싸서 착용하고 아침저녁으로 부친의 무덤에서 곡읍을 하며 3년상을 마쳤다고 한다. 그 사이에 평안감사에 임명되었으나 시묘를 이유로 거절하자 영조가 직접 식물(食物)을 하사하였다. 관직을 그만 둔 후에 고향인 서산으로 돌아와 낸 진계소(陳戒疏)는 우국충정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1748년(영조 24) 나이 80세가 되면서 숭록대부에 특진되었다. 한편, 김홍욱을 배향한 성암서원에는 창건 당시 청건 상소와 서원 건립에 물재를 부조하였던 인명록이 첨부되어 있는데 여기에 김홍욱의 종증손인 황해감사 김유경의 이름이 있다.

[묘소]

서산시 지곡면 연화리 마을회관에서 서쪽의 연화골 방향으로 약 350m 정도 거리의 소로변에 김유경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신도비 남쪽의 낮은 언덕 정상부에 묘역이 있다.

[상훈과 추모]

1751년(영조 27)에 김유경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명정을 받아 정려를 세웠으며,1754년에 효정(孝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현재 서산시 음암면 유계2리 한다리마을김유경의 정려가 위치한다. 또한 1764년(영조 40)에 김유경의 아들인 김한방(金漢房)이 건립한 신도비가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06.22 내용 수정 상훈과 추모부분 정려 건립관련 내용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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