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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부장리 고분군 출토 금동식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89
한자 瑞山富長里古墳群出土金銅飾履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 음암로 499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이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백제
출토|발굴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임대 아파트 신축 예정 부지에 대한 문화 유적 발굴 조사
현 소장처 국립공주박물관 -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360
원소재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 충청남도 공주시 금흥동 110-2
출토|발견지 서산 부장리 고분군[Ⅱ지점 6호분 6호 널무덤, 8호분 1호 널무덤] -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 산46-1지도보기
성격 신발
재질 금동
관리자 국립공주박물관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에 있는 서산 부장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 편.

[개설]

서산 부장리 고분군 출토 금동식리는 서산 부장리 고분군 Ⅱ지점 6호분 6호 널무덤과 8호분 1호 널무덤에서 출토되었다. 백제의 금동식리는 금동관과 함께 피장자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위세품이자 장송용품(葬送用品)이다. 중앙에서 지방의 수장에게 사여하는 것으로서 피장자의 위상을 인정해 주고 중앙과 지방을 이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서산 부장리 고분군 출토 금동식리는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 세력의 위상을 보여준다.

금동식리는 제작 시기에 따라 제작 기법과 문양이 다르지만, 대체로 측판 2매와 바닥판 1매로 구성되어 있고, 바닥판에 좌우 측판을 접어 콧등과 뒤축을 여며 붙인 형태로 양면이 대칭되는 구조이다. 바닥에는 뾰족한 방추형의 금동 못이 붙어 있는데, 적게는 10개부터 많게는 18개까지 확인된다. 금동식리의 문양은 ‘凸’형 등의 단순 투조 문양에서 유기적인 용봉문(龍鳳文)이나 연화문(蓮花文), 초화문(草花文) 등의 문양으로 발전되었다. 투조 기법에 부가하여 조금(彫金)과 타출(打出) 기법을 병행하는 등 장식성을 강조한 금동식리의 문양들에서 높은 예술성을 엿볼 수 있다.

[형태]

서산 부장리 고분군 출토 금동식리는 완전히 파손된 상태로 원형 복원이 되지 않아 전체 형태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남아 있는 식리편(飾履片)을 토대로 살펴볼 때, 6호분 6호 널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식리는 좌우 측판과 바닥판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식리 바닥에 박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끝이 뾰족한 사각추 모양의 청동 못이 2개 확인된다. 식리의 측면(側面) 또는 상면(上面)으로 추정되는 편(片)은 ‘凸’형으로 투조(透彫)되어 있고, 바닥으로 추정되는 편에는 귀갑문(龜甲文)과 용봉문이 투조되어 있다.

8호분 1호 널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식리는 금동제로 좌우 측판과 바닥판이 남아 있으며, 식리 바닥에 박았던 끝이 뾰족한 사각추 모양의 금동 못이 8개 확인된다. 식리의 측면 또는 상면으로 추정되는 편은 ‘凸’형으로 투조되어 있고, 바닥으로 추정되는 편에는 역시 귀갑문과 용봉문이 투조되어 있다. 조금 기법은 원과 선의 시문에 주로 사용되었다.

[특징]

서산 부장리 고분군 출토 금동식리는 주로 금동관과 동반 출토되는 백제의 금동식리의 일반적인 출토 양상과 달리 금동관을 동반하지 않고 출토되었다. 6호분과 8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식리 모두 동판(銅板)에 금장(金裝)한 금동제(金銅製)이다.

[의의와 평가]

한성 백제 시기에는 장송 의례용품으로 금동식리를 사용하는 문화가 있었으며, 당시 사회에서 금동식리는 금동관모와 마찬가지로 최고위 지배층이 공유하는 물품이었다. 서산 부장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식리는 이 시기 백제가 서해안 루트의 중요 거점 지역으로서 해상 교통의 요지로 서산의 지역적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증명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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