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85
한자 瑞山富長里古墳群出土金銅冠帽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음암로 499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이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백제
출토|발굴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임대아파트 신축 예정 부지에 대한 문화 유적 발굴 조사
현 소장처 국립공주박물관 -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원소재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 충남 공주시 금흥동 110-2
출토|발견지 서산 부장리 고분군[Ⅱ지점 5호분 1호 널무덤] - 충남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 산46-1지도보기
성격 관(冠)
재질 금동(金銅)
크기(높이,길이,너비) 15.5㎝[높이]|17.5㎝[너비]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에 있는 서산 부장리 고분군의 널무덤 목관 내에서 출토된 금동관모.

[개설]

서산 부장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4~5세기에 백제 지방의 중요 거점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최고의 위세품이다. 서산 부장리를 비롯하여 공주 수촌리, 천안 용원리, 익산 입점리, 나주 신촌리, 고흥 길두리 등 백제 금동관이 출토된 곳의 입지적 특성은 백제가 지방으로 진출하거나 각 지역에서 왕도인 한성으로 이동하는 교두보라는 것이다. 각 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시대적으로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제작 기법이나 구조 형태, 문양 등을 계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 금동관은 크게 관(冠)과 관모(冠帽)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관이란 일정한 폭을 가진 띠 모양의 대륜(帶輪)에 이것과 결합되는 입식(立飾)으로 구성되어 있거나 입식 없이 대륜으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머리에 쓸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반면에 관모(冠帽)는 고깔 모양의 모자로서, 좌우의 양 측판과 이것을 고정하는 복륜부(覆輪部)로 이루어져 있거나 복륜부가 없는 경우가 있으며, 머리에 쓸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금동관모는 익산 입점리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관모를 시작으로, 나주 신촌리(新村里) 9호분, 천안 용원리 고분군, 공주 수촌리 유적 Ⅱ지역 1호분과 4호분, 서산 부장리 5호 분구묘,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 등에서 모두 7점이 출토되었다. 가장 이른 시기로 편년되는 공주 수촌리 1호분 금동관모는 각 평판의 가장자리를 구획하여 외면에는 화염문(火炎文)을, 내면에는 용문을 매우 정교하게 표현하였다. 수촌리 4호분의 출토품은 외면 가장자리를 구획하여 장식하는 구성은 같으나 내면의 용봉문(龍鳳文) 등이 다소 퇴화되는 양상을 보여 준다.

서산 부장리와 고흥 길두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모는 공주 수촌리 유형의 기본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구조 형태가 간략화되었고, 내면을 용이나 봉황을 구획 안에 시문한 귀갑문(龜甲文)이나 이엽문(二葉文)등으로 일괄 도안하고 있으며 부재의 결합도 다양해지는 등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익산 입점리 금동관모는 이전의 금동관이 각종 판금 기법을 활용하여 장식성과 실용성을 강조하였던 것과는 달리 평판 위에 어린문(魚鱗文)을 이면(裏面) 타출(打出)하는 단순한 도안으로 구성되었으며, 외형적으로는 전후식(前後飾)이 생략되었다.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수발이나 전후식의 장식등이 완전히 배제되는 금동관모로 제작되었는데, 문양 표현도 정(釘)을 이용한 이면 타출 기법으로써 단순한 기법의 점열초화문(點列草花文)으로 장식하고 있다.

이처럼 금동관모는 구조 형태와 문양 등이 시기적으로 변화하였다. 아말감 기법을 활용한 도금 기술이 큰 변화 없이 모든 시기에 걸쳐 나타나듯 단계마다 기본형을 계승하면서 형태나 문양이 약화, 또는 퇴화되기도 하였고 새로운 특징이 부가되기도 하였다.

[형태]

서산 부장리 고분군 출토 금동관모는 전체적인 형태는 내관이 되는 반원형의 모관을 중심으로 전면과 후면에 입식을 세우고 하단에 테를 돌렸으며, 입식과 모관 전체에 원판 모양의 영락을 매달아 꾸몄다. 우측면 잔존 상태가 대체로 양호하나 좌측면은 중앙 부분이 결실되고 하단부도 일부 결실되었다. 모관의 중심이 되는 내관은 여러 개의 육각형 구획 안에 봉황문을 투조(透彫)한 두 장의 금동판으로 되어 있으며, 마주 닿는 주연부는 ‘∩’형으로 접은 좁은 금동판으로 테두리를 돌려 결합하였다.

모관의 전면과 후면에는 각각 다른 형태의 장식을 덧대어 붙였다. 전면 장식은 전체 형태가 육각형에 가깝고 상단부가 ‘山’ 자형으로 정면과 양 측면에 짧게 돌출부를 두었다. 내관과 전면 장식과의 결합은 원두정(圓頭釘)을 박아 고정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山’ 자형으로 돌출된 입식의 말단부 가까이에서 한두 개의 원두정이 관찰된다. 후면 장식은 방패 모양으로 상단부가 약간 둥글고 측면 모서리도 둥글게 처리되었으며, 하단의 모관 테에 접하기까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이어진다. 상단은 안쪽으로 완만하게 만입되어 있으나 하단으로 내려올수록 모관의 후단과 맞물리면서 급하게 접혀져 뾰족하게 처리되었다. 모관 테는 내관의 주연부와 마찬가지로 무늬가 새겨지지 않은 민판으로 되어 있는데, ‘V’형으로 접은 긴 금동판을 아래에서 위를 향해 모관의 하단에 끼워 결합하였다.

모관의 문양은 전체적으로 투조문과 조금문(彫金文)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여러 개의 육각형으로 구획되어 있다. 각각의 육각형 안에는 봉황을 하나씩 투조하였는데,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는 매우 역동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전·후면의 장식 역시 외곽 테두리 안에 모관의 문양과 같은 육각문과 봉황문으로 표현되어 있다. 내관과 전·후식에 모두 영락이 매달려 있거나 매달았던 흔적들이 있다.

[특징]

서산 부장리 고분군 출토 금동관모는 공주 수촌리 유적을 비롯한 다른 유적에서 피장자의 머리에 착장된 채 발견된 것과 달리 피장자의 가슴 언저리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관모 내면에 백화수피제 내관이 들어 있으며, 공주 수촌리나 익산 입점리 출토품에서 보이는 수발을 세운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금동관모에서 확인되는 시문(施文) 기법은 투조 기법[육각문, 용문, 봉황문 등의 윤곽선]과 조금 기법[용문, 봉황문 등의 세부선, 파상문 등의 점열선문], 타출 기법[주된 문양의 외곽부와 파상문 사이에 돌린 원형점열문] 등이며, 주된 문양은 육각문, 용문, 봉황문이다.

[의의와 평가]

백제의 한성 중앙은 지방 유력 세력의 장에게 금동관을 사여하여 정치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방의 지배 세력을 중앙 체제 내로 편입시켰다. 서산 부장리 고분군 출토 금동관모는 당시 서산 지방이 고대 국가 백제의 발전에서 중요한 거점 지역임을 잘 보여 주는 중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성 백제의 높은 금속 공예 기술과 예술적 안목을 잘 보여 준다. 금동관에 용과 봉황문을 모티브로 다양한 도상을 능숙한 조금, 도금 기술을 구사하여 표현한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