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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383
한자 高麗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윤용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284년연표보기 - 서산군(瑞山郡) 명칭 첫 등장

[정의]

918년 고려 개국에서 1392년 멸망에 이르기까지 충청남도 서산의 역사.

[개설]

고려 시대의 서산 지역은 부성군(富城郡)을 중심으로 지곡현(地谷縣), 정해현(貞海縣), 여미현(餘美縣), 고구현(高丘縣)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해안의 드나듬이 심한 서산 지역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많은 군현이 설치된 것이다. 이 중 여미현은 백제 때 여촌현, 신라 때 여읍현이었다. 서산시 운산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 가량 떨어진 여미리의 구 마을회관 일대가 백제 시대 여미현 터로 추정되며, 삼국 시대의 고분군을 비롯한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해미의 고읍치에 해당하는 정해현은 고려 통일 전쟁에 공을 세운 몽웅역(夢熊驛)의 아전 한씨(韓氏)를 포상하여 고구현의 땅을 나누어 설치한 곳이다.

해미현은 1407년(태종 7)에 정해현여미현을 통합하여 정해현치에 치소를 둔 곳이다. 지곡현은 백제 때 지육현(知六縣)이었으나, 신라 때 지육현(地育縣)으로 고쳐져 부성군의 속현이 되었다. 고구현은 백제 시대 우견현(牛見縣)으로 1018년(현종 9)부터 홍주의 속현이 되었는데,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과 홍성군 갈산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5개의 군현 이외에도 서산에는 향, 소, 부곡 등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서산에 행정 단위가 많이 분포한 것은 그만큼 지역의 세력 분포가 복잡하고 다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 시대 서산은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의 후원으로 보원사의 거찰이 중창되어 불교문화가 발전하였다. 서산 보원사는 화엄 10찰에 꼽힐 정도로 융성하였고 탄문에 의해 화엄종 입장에서 선종 사상을 융합하려는 사상 경향을 보였다. 그 외에도 서산의 불교문화를 주목할 수 있게 만들 만한 각종 불교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서산의 명칭 유래]

고려 시대 서산의 중심지는 부성군이었다. 부성군은 백제의 기군(基郡)으로 신라 때 부성으로 이름을 바꾸어 고려로 이어졌으며 12세기 고려 인종 때에는 부성에 현령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1182년(명종 12) 민란이 일어나 현령과 현위가 지역민들에 의하여 갇히고 죽임을 당하는 하극상이 일어나자, 이에 대한 징계 조치로 행정 구역이 폐지되었다.

이후 14세기 서산 출신 인물로 공신호를 받은 정인경(鄭仁卿)이 행정 구역 복원 운동을 전개하여 1284년(충렬왕 10) 부성현이었던 서산이 ‘서산군(瑞山郡)’으로, 그리고 같은 왕대에 다시 서주목으로 승격하였다. 즉 현에서 군 혹은 목으로의 승격과 함께 부성이 서산(瑞山) 혹은 서주(瑞州)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1310년(충선왕 2) 서주목이 다시 서령부(瑞寧府), 그 후 서주로, 1413년(태종 13) 서산군으로 각각 조정되었다.

[해상 교통의 요지]

고려 시대 서산은 고려 13조창의 하나인 영풍창(永豊倉)이 소재했으며, 운하를 굴착하여 천수만가로림만의 남북 바다를 연결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였다. 영풍창은 국가 조세 확보의 거점으로서 크게 중요시되었던 시설이다. 영풍창과 운하 공사 시도를 통해 고려 시대에 서산이 수운 교통의 핵심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충청남도에 조창은 서산 영풍창이 유일했다는 것도 큰 의미를 가진다.

한편, 운하 공사는 지반 재질 등의 이유로 고려 시대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조선 시대까지 공사가 이어졌다. 이 운하 공사가 계속 이어진 이유는 태안의 험한 바닷길에 많은 배가 침몰되어 큰 피해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남쪽에서 고려의 개경으로 조운과 물자를 운반할 때 이용하던 항로가 서산 태안을 잇는 교통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만큼 서산의 해상 교통로가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상 교통로의 발달은 14~15세기에 왜구의 침입을 받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할 수 있다. 왜구의 약탈로 고려의 조운제가 큰 피해를 입었고 왜구로 인한 피해는 고려 말의 사회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에 조선 시대에는 해미에 병마절도사를 파견하여 왜구의 침입을 막게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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