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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021
이칭/별칭 노적가리,낟가릿대,베가레,벼장대,화적,화간,도간,화균,화간제,기년화적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강성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5년연표보기 - 서산 볏가릿대 풍속-제26회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 국무총리상 수상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에서 음력 1월 15일에 볏가릿대를 세우고, 음력 2월 1일 볏가릿대를 내리는 볏가릿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가정의 평안을 축원하는 의례와 놀이.

[개설]

충청남도 서산시를 비롯한 내포[충청남도 서북부 가야산 주변] 지역에서 가장 특징적인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 및 이월 초하루 민속[음력 2월 1일]은 볏가릿대를 세우고 내리는 전통이다. 볏가릿제란 오곡의 씨앗이나 곡물을 싸서 장대[볏가릿대]의 끝에 매달아 마을의 공터나 공동 우물 또는 부잣집 마당 옆에 세워 놓고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 의례(祈豊儀禮)의 하나이다. 그 명칭은 마을에 따라 노적가리·낟가릿대·베가레·벼장대·유지기·보름대·풍년춤 등 다양한 이름으로 호칭되고 있으며, 한자로는 화적(禾積)·화간(禾竿)·도간(稻竿)·화균(禾囷)·화간제(禾竿祭)·기년화적(祈年禾積) 등으로 묘사되어 있다.

볏가릿대는 이월 초하루의 머슴날 전통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예전에는 머슴날은 주로 서산·당진·예산 등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서산 지역에서는 이월 초하룻날 아침에 ‘주대’[쟁기질 등에 필요한 각종 동아줄]를 드린 다음, 마을의 구성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월 대보름에 세운 볏가릿대 앞에 제수를 차리고 풍농을 기원하는 제를 지낸다. 그리고 ‘꽃반’이라 하여 풍물패들이 가가호호를 돌며 진종일 지신밟기를 해주는 것이 관례였다. 지금도 머슴날을 잔칫날로 여겨 볏가릿제를 지내거나, 마을마다 푸짐하게 음식을 준비하여 주연을 베푸는 곳이 적지 않다.

[부의 상징이었던 볏가릿대의 전통]

볏가릿대를 세워 풍농을 기원하는 의례는 이미 조선 전기에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연산군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이조좌랑을 거쳐 우참찬에 올랐다가 중종 때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해임된 이자(李耔)[1480~1533]의 『음애일기(陰崖日記)』에는 “나라의 풍속에 정월 대보름날 빗자루 모양으로 낟알이 많이 달린 벼이삭을 짚으로 엮어 통째로 묶어서 나무에 걸고 풍년을 기원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사실상 볏가릿대와 동일한 세시 풍속이 당시에도 널리 전승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유득공(柳得恭)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짚을 묶어 깃대 모양을 만들고 장대 끝에 붙들어 매어 집 곁에 세우고 새끼를 내려뜨려 고정시킨 것이다. 이것을 화적이라 한다. 조선조 고사에 정월 보름날 궁궐 밖에서는 빈풍(豳風) 7월의 경작·수확의 형상을 모방하여 좌우로 나누어 힘을 겨룬다. 이것 또한 풍년들기를 비는 뜻이다. 민간[閭巷]의 화간도 이런 일일 따름이다.”라고 하여 조선 후기에 전승되었던 화적·화간의 전통을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또한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시골 인가에서는 보름 전날 짚을 묶어 깃대 모양으로 만드는데 그 안에 벼·기장·피·조의 이삭을 집어넣어 싸고 목화를 그 장대 위에 매단다. 그리고 이것을 집 곁에 세우고 새끼를 늘어뜨려 고정시킨다. 이것을 화적이라 한다.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다.”라고 하여 좀 더 자세하게 부연하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 볏가릿대는 가난한 농민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볏가릿대는 주로 부잣집이나 가산이 넉넉한 반가(班家)에서나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순조 때의 문인 화가 권용정(權用正)이 집필한 『세시잡영(歲時雜詠)』에 실린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열 척의 긴 화간 사람처럼 서 있고/ 꼭대기에 묶인 풀 바람에 날리네/ 부잣집 사들인 땅 대부분 기름지니/ 해마다 곡식이 잘 익기를 기원하네/ 달구지에 실어온 볏단 집안에 가득하여/ 닭이나 개조차 먹을 만큼 넉넉하네/ 가난한 집 송곳 꽂을 땅도 없으니/ 지붕 위에 어찌 화간을 세우리오/ 부잣집 닭과 개에게도 미치지 못하니/ 종일토록 일을 해도 먹지를 못하네/ 가난한 사람들아 부잣집 화간 부러워 말라/ 눈 깜짝할 사이에 입장이 바뀐다네/ 지난해 동쪽 집에 세운 화간이/ 올해 다시 서쪽 집 지붕에 있네/ 해마다 화간은 세우고 내리지만/ 평생 바라는 일은 뜻대로 되지 않네/ 어느 때에나 다시 균전법이 행해져/ 마을마다 집집마다 화간 높이 세울까.”

이 시는 풍농의 기원이라는 볏가릿대 본연의 목적에 초점을 두고 읊은 것이 아니라, 당시 부농과 소작농 사이의 빈부의 격차를 대조적으로 부각시키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있었던 농민들을 위로하고, 토지 제도의 개혁을 바라는 작자의 소망을 담은 것이다. 그리하여 부잣집 지붕 위에 흩날리는 화간의 모습을 목도한 작자는 장차 마을마다 집집마다 볏가릿대를 세울 수 있는 시절이 도래하기를 은근히 희구하고 있다. 권용정의 시에 묘사되었듯이 조선 후기 볏가릿대는 ‘부’를 상징하는 깃발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지난날 서산 지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볏가릿대를 세우는 다양한 풍습]

일제 강점기 볏가릿대에 주목한 송석하(宋錫夏)는 현재는 인멸되어서 상세한 조사가 어렵지만 그 계선(界線)이 한강 이남으로 갈수록 성행한 것만은 분명하다고 언급하고, 그 예로 충청남도 당진군 고대면 진관리의 사례를 들고 있다. 이미 지적했듯이 볏가릿대는 충청도 내포 지역에서 주로 전승되고 있어 한강 이남의 벼농사 지대에서 분포했던 민속임을 짐작케 한다.

서산의 볏가릿대 풍속은 1985년 강원도 강릉에서 열린 제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충청남도 대표로 출연하여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근래까지 서산 지역에서 전승되었던 볏가릿대 풍속은 그것을 세우는 주체와 장소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동제와는 무관하게 가정에 볏가릿대를 세우는 관행이다. 『경도잡지』나 『동국세시기』 등에 묘사된 것처럼 조선 시대 볏가릿대는 주로 부잣집에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산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차리의 경우 1996년까지 4개의 반에 볏가릿대를 세웠는데, 풍물패들과 마을 사람들이 각 반에서 가장 잘사는 집을 택하여 그 집 마당에 세워 주었다. 이에 대해 서산의 향토 사학자 이은우는 머슴살이를 하거나 소작인들이 부잣집을 순회하며 볏가릿대를 세워 주었다고 한다. 이는 그 집안의 풍농을 기원하는 뜻도 있지만,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 볏가릿대를 세워 주면 주인집에서 푸짐하게 술과 음식을 내어 대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 부잣집은 물론 마을 공동으로 볏가릿대를 세우는 사례이다. 충청남도 서산시 동문동 향교골의 경우 1960년대까지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의 청년들이 모두 나와 어김없이 볏가릿대를 세웠다. 이때 가장 먼저 공동 우물 옆에 볏가릿대를 세운 뒤 이장이나 상노인이 제관이 되어 간단하게 제상을 차려 놓고 풍농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냈다. 그런 다음 풍물패들이 공동 우물을 빙글빙글 돌며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샘굿을 하고, 마을에서 잘사는 집을 차례로 돌며 볏가릿대를 세워 주었다. 예전에 향교골은 부촌이었던 까닭에 원하는 가정이 있으면 모두 세워 주었는데, 마을에서 10여 호 이상 세우는 게 보통이었다. 볏가릿대를 세우고 나면 역시 간단하게 제상을 차려 고사를 지내고, 이어서 조왕→ 터주→ 성주→ 외양간 등을 돌며 지신밟기를 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

셋째, 마을 차원에서 볏가릿대를 세우는 관행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조선의 향토오락』에서 서산의 볏가릿대에 대하여 보고한 내용을 참고할 만하다.

“화적[베가레], 정월 보름, 마을의 큰 마당[또는 넓은 밭]에 높이 9m 정도의 막대기를 세워 그 끝에 짚단을 매달고 그 바로 아래에 벼이삭이 늘어진 것처럼 보이도록 새끼줄을 여러 개 매달아서 사방으로 뻗치게 한다. 이 아래서 농민들은 농악을 연주하면서 풍년을 기원한다. 이때 각 집에서는 술이나 떡을 제물로 내고, 제사가 끝나면 마을의 노인이나 유지를 초대하여 잔치를 연다. 잔치가 끝나면 농악대는 각 집을 찾아다니며 기부금을 모아 마을 공동의 경비에 충당한다.”

위 인용문에서 볏가릿대를 세운 장소는 마을의 큰 마당이나 넓은 밭이다. 이는 가정집이 아닌 마을의 공공장소에 볏가릿대를 세운 것으로 풀이된다. 고로 여기에서 볏가릿대는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정월 대보름 및 이월 초하루 마을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볏가릿대 밑에서 흥겹게 풍장을 치면서 풍농을 비는 제사가 끝나면 노인과 유지들을 초대하여 동네잔치를 열고, 각 집을 돌며 지신밟기를 행한 것은 볏가릿대 풍속이 여느 동제와 마찬가지로 마을 축제로 기능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동제로 거행된 볏가릿대는 오늘날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환성리연화리를 비롯한 여러 마을에서 확인되고 있다.

[마을 축제로 승화된 머슴날 볏가릿제]

볏가릿대의 풍습은 조선 후기 이래 주로 벼농사 지대에서 전승된 세시 풍속이었다. 각종 사료를 검토해 보면 한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반가나 부잣집에서 개별적으로 화간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산 지역을 비롯한 내포 지역에서는 가정집은 물론이고, 한편으로는 마을 차원에서도 볏가릿대를 세우고 풍농을 예축(豫祝)하는 동제로 기능하여 왔다. 동제로서의 성격은 곧 다른 지역에서는 일찍 소멸된 볏가릿대가 오늘날까지 내포에서 지속될 수 있었던 핵심 기재로 작용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볏가릿대를 내리는 전통은 이월 초하루 머슴날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즉 정월 대보름날 세운 볏가릿대는 이월 초하룻날 제를 지낸 다음 내리는데, 장대가 쓰러지면 여기에 매달아 두었던 넣어둔 쌀이나 오곡의 종자를 꺼내어 그 상태를 보고 농사점을 친다. 즉 쌀이 불어 있으면 그해는 물 사정이 좋아 풍년이 들지만, 만일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흉년이 들 조짐으로 여긴다.

이와 같이 이월 초하루 머슴날을 일꾼들의 생일로 귀히 여겼던 전통과 볏가릿대를 내리는 관행이 연계됨으로써 그 전승력을 강화시키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 결과 볏가릿대 세우기와 그에 수반된 의례와 놀이는 내포 지역 민속 문화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문화 요소로 자리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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