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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886
한자 趙益祥
영어공식명칭 Cho Iksang
이칭/별칭 서옹(瑞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행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485년 - 조익상 사재를 털어서 진휼에 힘씀
거주|이주지 임천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지도보기
묘소 임천 지장동 -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덕림로 313-63[점상리 산168-1]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남성
본관 풍양(豐壤)
대표 경력 부사과

[정의]

조선 전기 부여 지역에 세거한 문인.

[가계]

조익상(趙益祥)[?~?]의 본관은 풍양(豐壤)이며, 자는 서옹(瑞翁)이다. 조익상의 고조할아버지는 고려 시대에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지낸 조염휘(趙炎暉)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회양도호부사(淮陽都護府使)를 지낸 조신(趙愼)이다. 할아버지는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낸 조안평(趙安平)이다. 아버지는 통사랑(通仕郎)을 지낸 조후지(趙厚之)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 朴氏)이다. 부인은 신지로의 딸 곡성 신씨(谷城 申氏)이다. 조익상은 4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조익상의 증조할아버지 조신이 고려 말에 신돈(辛旽)의 섭정으로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부여 임천에 은거하면서 풍양 조씨가 부여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조신의 손자 조후지는 조익조, 조익희, 조익상, 조익우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셋째 아들인 조익상의 후손이 가장 번성하였다. 임천 지역 여러 마을의 풍양 조씨 후손 가운데 조익상의 후손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485년(성종 16) 8월 2일 기록에 조익상과 관련한 일화가 전한다. “지평(持平) 송질(宋軼)이 경연(經筵) 도중에 전국에 가뭄이 들어서 구황에 힘쓰는데 사재를 털어서 진휼에 힘쓰는 지역 인사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임천에 사는 조익상이었다. 또한 송질은 “조익상이 쌓아 놓은 곡식이 거의 1만 석에 이르는데 충청감사가 보고한 사비곡(私備穀)이 1만 1000석밖에 안 된다”고도 비판하고 있다.

이로 보아 조익상은 임천 지역에 세거하면서 많은 재력을 확보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익상은 부사과(副司果)였다가 증직으로 보사공신 조봉대부 사헌부장령(保社功臣 朝奉大夫 司憲府掌令)이 되었다.

[묘소]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조익상의 묘표에 따르면 조익상의 기일은 7월 22일이며, 묘소는 임천 지장동(紙匠洞)[현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점상리 산168-1]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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