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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386
한자 歷史
영어공식명칭 Histo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행묵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지역의 역사 시대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

[선사 시대~삼한 시대]

부여 지역에 언제부터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하였는지는 구체적이지 않다. 부여 지역에서는 외산면홍산면의 지표 조사를 통하여 구석기 시대 유물이 수습되었다. 외산면 반교리에서는 몸돌 1점이, 홍산면 좌홍리에서는 양날찍개 1점이 수습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도 마찬가지이다. 은산면규암면에 신석기 관련 유적이 수습되었다. 은산면 은산리 유물산포지에서는 빗살무늬토기편과 민무늬토기편 등이 나왔다. 규암면 나복리 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 2점이 수습되었다. 부여 지역에서도 신석기 시대 인류의 문명 활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부여 지역의 가장 중요한 선사 유적은 청동기 시대 주거지였던 초촌면송국리 유적이다. 송국리 유적은 대표적인 청동기 유적으로 집자리와 토기가 특징적이다. 따라서 타원형 구덩이와 송곡리형 민무늬토기가 발견되면 동일 문화권 혹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표고 40m 정도의 낮은 구릉에 위치하였으며, 1975년 조사가 시작되어 여러 차례 발굴이 진행되었다. 이를 통하여 송국리 유적은 부여 지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변화상과 문화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임이 확인되었다. 이처럼 청동기 시대 부여 지역은 발달된 농경을 바탕으로 청동기를 자체 제작하였을 정도로 문화적 선진 지역이었다. 이후 삼한 시대 부여의 모습은 구체화하기 어렵다. 다만 합송리 유적 등의 흔적과 금강을 끼고 논과 밭이 발달되어 있어 사람이 계속 살아 왔음을 추정할 수 있다. 마한의 54국 중 고포국과 초산군을 부여 지역에 비정하기도 하지만, 뚜렷한 근거가 없으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고대]

부여는 백제 성왕 대부터 의자왕 대까지 6명의 왕이 123년간 통치한 백제의 수도였다. 사비 천도 이전 부여의 백제 시대 유적은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으나 웅진 시대에 들어와 정동리 유적 등 생산 유적과 능사 축조 이전의 건물지 등이 보여 웅진의 외곽 도시로서 발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성왕은 국력을 회복한 백제의 위상에 걸맞는 드넓은 공간이 확보된 사비로 천도하기로 결정하고 나라의 명칭도 백제에서 부여로 바꾸어 국가의 부흥 의지를 천명하였다. 성왕사비로 천도한 이후 여러가지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웅진 시대 시행된 담로제를 보완한 5방제의 시행으로, 3단계의 통치 구조를 통하여 지방에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위덕왕 대에는 여러 불교 사찰을 건립하여 국가의 사상적 통일을 기하고, 관산성 전투의 패배를 딛고 국력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또한 중국의 남조뿐만 아니라 북조와도 통교하는 등 남북조 동시 외교를 주도하여 국제 외교를 활발히 하였다. 무왕이 즉위하자 신라에 대한 공세를 다시 시작하였고 소극적인 신라 대외 정책에서 적극적인 정책으로 변화하였다. 중국에 대하여서는 고구려와 화해책을 쓰는 양면 정책으로 선린 정책을 유지하였다. 일본에 대해서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무왕 시기에 익산 경영이 주목된다. 당시 익산 경영은 호남 지역의 지배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측면이 매우 강하였다. 무왕의 뒤를 이른 의자왕은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의자왕의 치세 전반기 정치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신라와 당을 견제하기 위한 고구려와 통교하여 신라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의자왕이 신라 서쪽의 성 40여 곳을 빼앗고, 당항성을 막고자 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신라와 당나라의 공격으로 사비를 수도로 하던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통일 신라 시대~고려 시대]

660년 부여 도성은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었다. 당은 점령 지역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옛 백제 지역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신라에서는 부여에 총관을 두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신라가 당나라를 축출하고 670년 통치를 확립하였다. 신라는 충청남도 지역을 웅천주로 편제하고 치소를 공주에 두었다. 충청남도 지역의 중심이 부여에서 다시 공주로 옮겨간 셈이다. 부여를 ‘부여’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은 통일 신라 경덕왕 대 일이다. 군현명을 대대적으로 고치는 과정에서 소부리[사비]는 부여가 된 것이다. 후삼국 시기에 금강 지역은 격전지였다. 견훤의 건국 초기 공주는 후백제의 세력권에 있었다. 궁예가 축출되고 고려가 건국되자 왕건은 공주를 공격하고 홍성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여는 처음에 후백제권에 들어갔다가 이후 후고구려권에 들어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건국 직후에는 다시 후백제에 귀속되었으나 홍성이 고려에 함락되면서 부여 또한 고려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 신라 시대 부여는 부여, 임천, 홍산, 석성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고려 시대에 이르러 백제 도성 지역에 해당하는 부여군은 약화되었다. 고려 현종 연간 부여현은 공주의 속군이 되어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반대로 임천의 경우에는 과거의 지위를 대체로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임천은 주군현으로서 현령이 1군 4현을 관장하였다. 임천은 고려 시대 부여 지역의 중심 지역이었고 위상도 가장 높았다. 임천은 원간섭기에 임주로 승격되고 지사관이 수령으로 파견되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탈 과정에서 홍산은 중심에 있었다. 왜구가 1376년(우왕 2) 대거 부여 지역으로 침입하자 최영은 홍산 지역으로 행군하여 왜군을 격퇴하였다. 이를 홍산대첩이라고 부른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 부여 지역은 임천에 군수가, 부여, 석성, 홍산에 현감이 파견되었다. 군사 편제에서도 단일한 것이 아니라 홍주와 공주로 각각 나뉘어져 있었다. 임천, 부여, 석성은 공주진관에, 홍산은 홍주진관에 속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다양한 국가 시설물이 설치되었다.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4곳의 향교가 각각 설치되었고 사직단과 여단, 성황단이 4개 군현에 모두 위치하였다. 향소부곡과 같은 특수 행정 구역도 존재하여 임천군에는 4곳, 부여현홍산현에는 각각 2곳의 소와 부곡이 존재하였다. 공무 수행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도 부여현에는 은산역과 용전역, 임천군에는 영유역, 홍산현에는 숙홍역이 있었다.

조선 전기 부여군의 경제 활동은 오희문이 남긴 일기에 자세하게 남아 있다. 부여 지역의 큰 장으로 꼽는 부여장, 은산장, 임천장, 홍산장이 대부분 금강을 끼고 있어서 이로써 다양한 물품 교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금강을 통한 생활 양상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조선 시대 부여 지역을 둘러싼 가장 큰 사건은 역시 이몽학의 난이었다. 이몽학홍산현 출신이고 홍산을 중심으로 난을 계획하고 반란을 일으키다 보니 부여 지역의 사족들에게 이몽학의 난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조선 후기 부여 지역의 사족들도 중앙의 여러 정치적 사건과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광해군 폐모 사건, 기사환국, 신임옥사는 각각 부여 지역 출신의 중앙 관직자와 연결되면서 지역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부여 지역의 경제상은 금강 유역을 통한 포구와 저산팔읍으로 대표되는 모시 장시망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근현대]

오늘날 부여군의 행정 구역이 형성된 것은 1914년 군면 폐합이 단행되면서부터이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이전에 부여군에는 10개 면, 홍산군에는 9개 면, 임천군에는 21개 면, 석성군은 10개 면이 있었다. 군면 폐합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50개의 면은 모두 16개 면으로 통폐합되었다. 그리고 467개에 달하던 동리는 191개로 줄어들었다. 2.5개 면이 1개 면으로 통합된 셈이다. 그리고 임천, 석성, 홍산에는 치소를 두지 않고 부여에만 군청을 두었다. 행정 구역이 통폐합되는 과정 속에서 전통 사회의 질서가 해체되었다. 1920년대 말 조사에 따르면 부여의 동족 마을은 50여 개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후 전통 마을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부여 지역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근대 학교와 종교 기관이 들어선 것이다.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근대 학교 설립은 임천에 4곳, 석성에 3곳, 홍산과 부여에 각각 2곳이 설립되었다. 일제 통치 아래 학교 교육이 탄압을 받으면서 야학이 성행하게 되었다. 부여 지역의 야학과 강습소는 지역 유지에 의해서 발의되기도 하고 청년을 중심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부여 지역의 민족 운동으로는 3·1운동을 비롯하여 청년 운동, 농민 운동, 비밀결사 운동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장정마을의 민족 운동을 들 수 있다.

해방 이후 부여 지역에서도 통일 민족 국가 수립을 위한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활동하였다. 독립촉성부여협의회, 부여독립촉성청년회, 부여군인민위원회, 부여청년동맹, 부여군농민조합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체들은 미군정 시기를 거치면서 점차 중앙 조직과 같은 형태로 전환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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